배관설비 전문 중소기업인 아세아유니온은 업계에서 '히든 챔피언' 혹은 '주연급 조연(助演)'이란 얘기를 곧잘 듣는다. 건물에는 없어선 안 될 필수 설비를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회사의 주력 제품은 배관 이음쇠,밸브,소방용 스프링클러 등이다. 싱크대 밑이나 지하 보일러실,천장 배관실 등 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음지' 제품들이다보니 일반인은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숨겨진' 제품으로 회사가 올리는 매출은 연간 450억원(2009년 기준)에 이른다. 수출 규모(연간 1500만달러)로는 중국 하이량그룹(연간 1억달러)에 이어 세계 2위.박광진 아세아유니온 대표(47)는 "우리가 을(乙)인데도 미국이나 캐나다 출장을 가면 현지 건축자재 업체로부터 칙사 대접을 받기 일쑤"라며 "더 좋은 가격에 납품받기 위한 갑(甲) 간의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아세아유니온의 태동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오사카공고를 나온 고(故) 박병우 회장(1998년 작고)이 '로꾸로(쇠 깎는 선반 기계)' 6대를 들여와 서울 신설동에 차린 경성공업사가 시초다.

박 회장의 제자였던 손승조 기술개발실장(68)은 "당시는 우리나라에 금속가공 기술이 전무하다시피 한 때"라며 "미군들이 버린 기계부품을 주워다 약간 손질해 팔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전남 무안이 고향인 박 회장은 초 · 중 · 고교를 모두 일본에서 마친 뒤 1946년 귀국했다. "한국에 선반 기술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첫 직업은 그러나 생뚱맞게도 교도관(광주형무소).고교를 졸업한 후 일본 기계부품회사에서 이미 3년간 실무를 익힌 그였지만 취직할 만한 회사 자체가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기계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박 회장은 결국 교도관 생활을 접고 1958년 서울로 상경해 직접 공업사를 차렸다. 여기서 만든 첫 작품이 볼트와 너트."청계천변에 가마니를 깔아놓고 쇠뭉치를 하나씩 깎아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정교한 부품을 처음 본 공구상들이 볼트 너트뿐만 아니라 각종 기계부품을 주문해 현찰로 사갔다고 합니다. "(박광진 대표)

박 회장은 '깎기의 달인'이었다. 쇠를 찰흙처럼 주무를 줄 알았다. 볼트 너트는 물론 형태만 있다면 무슨 물건이든 만들었다. 심지어 전구소켓과 주삿바늘까지 쇠를 깎아서 제작할 정도였다. 지금의 주력 제품인 배관 이음쇠도 이때 처음 깎아서 만들었다. 국내 배관설비 산업의 효시인 셈이다. 박 회장에게 '청계천 니쁠(Nipple)'이란 별명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손 기술실장은 "원래 이음쇠는 미국식으로 피팅(Fitting)이라고 해야 맞는데,일본인들이 자꾸 이음쇠가 꼭 젖꼭지를 닮았다고 해서 니쁠이라고 하는 바람에 그런 별명이 붙게 됐다"고 말했다.

국내 최초,최고의 선반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회사는 좀처럼 성장하지 못했다. 박 대표는 "가내수공업 같은 형태여서 일감 주문이 대량으로 들어와도 소화할 수가 없었다"고 전했다.

회사는 1977년 경기도 양주에 양산 공장을 지으면서 비약적인 성장의 기회를 맞이했다. 전남 광주의 갑부 집안에서 '유망한 사업'이라며 큰 돈을 투자한 덕택이었다. 국내 처음으로 주조 방식(쇳물을 거푸집에 넣어 형태를 만드는 방식)이 아닌 단조 방식(두드리거나 눌러 형태를 만드는 방식)으로 황동 배관 이음쇠를 개발한 것도 이때다.

튼튼하고 수명이 긴 단조 황동 배관 이음쇠는 곧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동업 관계는 얼마 가지 않아 삐걱거렸다. 1980년대 초 갑작스럽게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한 것.멀쩡한 공장을 둘로 나눌 수 없어 빚을 낼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닥친 시련이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동파이프' 온돌바닥 붐 덕택에 극복할 수 있었다. '풍산'등 유명 회사 동파이프 제품이 주공 아파트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동파이프 전용 밸브와 이음쇠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음쇠는 만들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10억~20억원 안팎이던 연 매출이 50억원대를 넘어선 것도 이 무렵이다.

10년 넘게 지속되던 동파이프 호황은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사그라졌다. 건설업계의 주문이 하루아침에 뚝 끊겼다. 이듬해 췌장암으로 고생하던 박 회장까지 작고하자 회사는 휘청거렸다. 박 대표가 갑작스럽게 경영을 맡게 됐다. 한의원과 개인사업체 경영 등으로 바쁜 세 명의 형들은 '성격 좋은' 막내를 옆에서 돕기로 했다.

그는 "돈을 융통한 경험이 있고 사람을 잘 다룬다는 이유로 얼떨결에 대표 자리를 맡은 뒤 처음에는 단 하루도 편하게 잠을 자지 못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주변에선 '새파란 막내아들을 사장에 앉힌 걸 보면 회사가 곧 무너질 징조'라는 얘기가 돌았다. 어음 결제가 막히고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했다. 150명이던 직원이 69명으로 줄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법.그는 고심 끝에 반도체장비와 PVC 건축자재,수지관 이음쇠 개발,소방자재 등 신성장 동력 찾기에 나섰다. 하지만 신사업 대부분은 번번이 암초에 걸렸다. 기존 업체들이 장악한 시장을 비집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다행히 '불이 나면 자동으로 열리는 소방밸브'와 밑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설치할 수 있는 '천장용 스프링클러 헤드' '플렉시블 가스관(휘는 이중 가스관)' 등 자체 개발한 소방자재가 그런대로 팔려나갔다. 박 대표는 "중소기업이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은 결국 과감한 기술개발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회사는 올해 550억원 이상의 매출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는 지난해보다 20% 이상 늘어난 규모.최근 국내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음용수관용 이음쇠로 미국 위생협회(NSF)의 인증을 따내는 등 기술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어 주문 물량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엔 포스텍기술투자로부터 20억원을 유치하는 데 성공,대외적으로 회사의 미래 가치를 인정받는 경사도 생겼다. 이르면 내년 안에 증시 상장도 추진할 계획이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