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검찰청은 지방검찰청만큼 빛나지 않는다. 일선 검사처럼 강력한 수사권을 동원해 인지수사(특별수사)도 하지 않고 언론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일도 드물다.

그러나 고검은 눈에 띄지 않지만 음지에서 중요한 일을 수행한다. 각 고등법원에 대응해서 설치된 고검은 항소사건소송 유지, 항고사건처리, 행정소송 대행 및 지휘감독,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항소심소송 대행 및 지휘감독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현재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 5곳에 고검이 있다. 특히 서울고검 송무부(검사장 홍만표)는'국고 유출 수호자'를 자처한다. 몇 천만원에서 수천억원에 달하는 국가 관련 소송을 지휘하면서 국민 혈세가 낭비되는 것을 감시한다.

◆150억원 국고 유출 막아내

서울고검은 이달 초 국가가 1심에서 패소한 149억원 조세 체납 사건을 뒤집고 승소판결을 이끌어냈다. 149억원의 조세를 체납한 W사는 2005년 K사에 161억여원을 빌려주고 K사의 부동산에 최고액 195억원의 근저당을 설정했다. 국가에 내야 할 돈을 결과적으로 엉뚱한 기업에 빌려준 셈이 된 것이다.

이에 국가는 2008년 이 채권을 압류했으나 K사가 계속 채무 반환을 거부하자 추심금청구소송을 냈다. 그러나 이미 K사는 2006년 이 부동산을 J사에 넘기면서 W사에 갚아야 할 채무 전액을 J사가 면책적으로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해 버렸다. 1심은 이 사실에 주목해 채권자인 W사가 이 계약을 승낙한 이상 국가의 압류 당시인 2008년에 이미 W사는 K사에 대해 더 이상 채권을 보유하지 않고 있다며 국가 패소판결을 내렸다. W사는 K사가 아니라 J사에 대해 채권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고검은 포기하지 않았다. 서울고검은 이 계약 체결 당시 W사의 대표이사 A씨가 사기죄로 수감돼 있다는 점에 착안해 그를 추궁했다. A씨는 부사장에게 해당 계약을 지시했다고 설명했으나,서울고검은 A씨와 부사장 간 접견기록이 없다는 점을 밝혀냈다. A씨 주변인들의 금전 거래 내역을 파악한 끝에 W사가 체납된 조세를 내는 것을 피하기 위해 허위 계약을 한 것을 밝혀냈다.

◆1심보다 500억원 높은 배상판결 받아내

서울고검은 최근 SK에너지 GS칼텍스 등 4개 정유사의 1998~2000년도 군납유류 입찰담합에 따른 손해배상소송 항소심에서 주무관청인 방위사업청과 함께 소송을 수행,1심 판결보다 500억원이나 더 많은 1309억원 배상 판결을 이끌어냈다. 2001년 이들 기업에 공정위가 1000억원대 과징금을 부과하고 관련자와 군 관계자에게 형사처벌을 한 것과 별도로 국가가 낸 손해배상소송이다. 형사처벌과 달리 민사적 손해액 산정에 있어서는 유류 가격이 매일 변동하는 데다 가격 변동에 미치는 요인들을 따로 분리해내기가 어려워 논란이 많았다.

국가는 유류 가격 산정 기준으로 아시아 최대 유류 완제품 시장인 싱가포르 현물시장에서 유류를 구입해 국내에 공급할 때까지 드는 비용을 산정,실제 낙찰가에서 이를 차감하고 정부 회계기준에 따라 각종 부대비용을 감안한'MOPS' 방식을 주장했다. 그러나 4개 정유사는 담합이 가격에 미친 영향과 다른 요소가 가격에 미친 영향을 분리해 적정 가격을 추정해내는 계량경제학적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고 맞섰다. 1심은 결국 계량경제학적 방식을 인정해 809억원의 원고(국가)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서울고검 등은 항소심에서 계량경제학적 가격 추론 방식은 학자들이나 기관에 따라 1000억원 가까이 차이가 나는 등 편차가 지나치게 크며,이 같은 고도의 경제학적 방법을 사용할 경우 법원이 판단하기 불분명하고 미국의 경우 반독점법 위반행위를 저질렀을 때 최대 3배까지 손해배상을 하도록 하고 있는 점을 집중 부각해 배상액을 증액시켰다.

또 최근 국내 B제조업체가 인천시장을 상대로 제기한 13억원 초과부과금 부과처분 취소소송에서 항소심 패소를 뒤집고 대법원에서 국가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인천시장이 B사 공장 집진시설에서 먼지허용 배출 기준을 넘는 먼지가 배출된다는 이유로 개선명령을 내리고 실제 시스템 개선이 이뤄진 기간까지 오염물질 배출에 대한 초과부담금을 부과한 것에 대해 B사가 반발해 소송을 낸 것이다. 항소심에서 쓴맛을 본 서울고검은 상고이유서를 상세히 기술하는 등 적극적으로 상고심에 임해 결국 이 판결을 다시 뒤집었다.

◆일선지검 지원하기도

배임수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H사의 전 대표이사 안모씨는 수사망이 좁혀오자 자신의 서초구 신동아 아파트를 배우자 명의로 증여하는 한편 징역형을 선고받기 직전 강남 도곡동 타워팰리스아파트를 아들들에게 증여했다. 형사판결이 확정되자 추징금 보전에 나선 검찰은 안씨의 계좌에 단돈 4만여원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울고검 송무부는 작년 3월 안씨의 아들들을 상대로 증여계약을 취소하고 부동산을 반환하라는 사해행위취소소송에 착수하라고 서울북부지검에 지시했다. 피고들은 대형 로펌을 동원해 "국가의 추징금과 사인 간 사법관계를 전제로 하는 사해행위취소는 함께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서울고검은 "추징금채권 역시 금전급부가 목적이며 원고가 국가일 뿐이지 공법상의 채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채권자취소권 행사를 금할 이유가 없다"고 반격했다. 결국 1 · 2심 법원은 모두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