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국수를 내다 팔았다. 얼마나 많은 주문을 받았는지 공장을 돌리는 전력이 모자랄 정도였다. 양조장을 인수해서는 가마니에 돈을 쓸어담을 정도로 큰 돈을 벌었다. 해방 후에는 설탕 공장과 양복지 공장을 지어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제품 값을 3분의 1로 떨어뜨렸다.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1910~1987년)은 민첩하면서도 멀리 내다봤다. 야심이 컸으나 현실적이었다. 한일병합의 비운을 맞은 해에 태어난 그는 기아와 궁핍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한국 사회에 실질적인 양식과 기술,기업 조직을 선물한 선각자요,경제 지도자였다. 그가 1969년 설립한 전자회사는 40년 만에 세계 최고의 전자회사로 등극,진정한 극일(克日)의 선봉장이 됐다.

절찬리에 상영 중인 영화 '전우치'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상인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500년 전 조선시대에서 현대로 환생한 가상의 인물 전우치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서울의 빌딩 숲을 보고 "저울 눈금을 속이며 자기 이익만 좇는 상인들이 어찌 백성들을 먹여 살리고 있느냐"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전우치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호암을 필두로 구인회 LG 창업주,정주영 현대 창업주 등이 엮어낸 성공 스토리는 20세기 세계사를 장식하는 최고의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암이 반세기에 걸쳐 일궈낸 37개 기업은 오늘날 삼성이 미국 GE(제너럴 일렉트릭),일본 도요타와 함께 세계 3대 제조업체의 반열에 등극하는 밑거름이 됐다. 스위스 멕스메이커스 컨설팅 한국대표를 맡고 있는 타릭 후세인은 "이병철 회장은 한국이 배출한 세기의 승부사이자 탁월한 '솔루션 프러바이더(문제해결사)'였다"고 평했다.

한국경제신문이 오는 12일 호암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특별기획을 준비한 이유는 단지 한 기업인의 일생을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생전에 보여준 치밀한 준비와 추진력,작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는 벤처정신과 끊임없는 혁신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퇴색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호암은 특히 개인의 욕망을 '사업보국(事業報國)'이라는 신념으로 승화시킨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외국의 원조 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조국 건설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싶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사업은 저절로 번영한다. 기업을 키우는 것이 최고의 애국이고 분배"라는 생전의 육성은 21세기 한국의 재도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업가 정신을 일깨워준다.

조일훈/김용준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