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가늘고 긴 손가락이 휴대폰 키패드 위에서 춤을 춘다. 30초쯤 지났을까. 어느새 애국가 1절 마지막 구절 '길이 보전하세'가 화면 위로 완성된다.

'번개 손가락'의 주인공은 배영호군(18)이다. 그는 최근 LG전자가 주최한 모바일 월드컵에 하목민양(17)과 함께 출전,종합 1위에 올랐다. 분당 350~400타의 속도를 기록해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자주 이용하지 않는 기성세대라면 "문자를 빨리 치는 대회도 있느냐"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대회는 규모와 상금면에서 엄연한 '프로급' 이벤트다. 우승 상금은 과장급 직장인의 2년치 연봉인 10만달러(약 1억1500만원).대회 참가 인원도 13개국 600만명에 달했다. 배군은 "문자 빨리 치기라면 자신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포털사이트를 통해 우연히 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대회 덕분에 처음으로 미국에 가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배군이 휴대폰을 처음 산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일정액을 내면 매월 3000개의 문자를 보낼 수 있는 청소년요금제에 가입해 매달 수천개의 메시지를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속도가 빨라졌다는 설명이다. 그는 "많이 보낼 때는 한 달에 8000개의 문자를 보낸 적도 있다"며 "대회 참가를 위해 미국 뉴욕에 머문 4일 동안 보낸 문자만도 400개에 달한다"고 말했다.

배군은 대회를 준비하며 휴대폰 자판 전문가가 됐다. 그는 "기능이 단순한 구형 휴대폰일수록 문자를 빨리 칠 수 있다"며 "풀터치폰은 제품의 특성상 오타가 잦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선호하는 자판은 LG전자가 채택한 'EZ한글'.그는 "초보자들이 이용하기에는 삼성전자의 '천지인'이 편하지만 문장 완성에 걸리는 시간은 'EZ한글'쪽이 빠르다"고 말했다.

대다수의 학부모는 하루종일 휴대폰을 달고 사는 자녀들을 걱정한다. 하지만 '문자왕'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통계를 보면 미국 청소년들도 문자 메시지를 많이 보낸다"며 "한국 학생들이 유별난 게 아니라 의사 소통 방식이 바뀐 것"이라고 말했다.

배군은 대입을 준비하고 있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로 방향을 틀었다. 장래 희망은 성악가. 관련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짬을 내 음악 레슨을 받고 있다. "성악보다 더 잘하는 게 있지 않느냐"고 묻자 웃음과 함께 "문자 입력을 직업으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상금의 용처에 대해서는 "아직 상금을 받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맡겨 저금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송형석/이현일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