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구 감독의 스릴러 '시크릿'은 지난해 12월 초 개봉될 무렵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톱스타 차승원 · 송윤아가 주연을 맡은 데다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 전개로 호평을 얻었다. 그러나 103만명(이하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집계 기준)을 동원해 흥행수입 36억원을 거둔 채 막을 내렸다. 45억원 규모의 제작비를 뽑아내지 못했다.

이 작품의 흥행 실적은 지난해부터 쏟아지고 있는 스릴러 장르에 대한 시장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경제신문이 지난해 전국에서 개봉된 스릴러 10편(상업영화 평균치인 총제작비 50억원 안팎 작품 기준)의 흥행 실적을 조사한 결과 단 한 편도 수익을 내지 못했다. 총제작비 20억원 미만의 저예산 스릴러 두 편만 수익을 거뒀다. 국내 영화는 극장 티켓 판매 수입이 전체 수입의 90% 이상을 차지,극장 흥행 실패는 사실상 투자손실을 의미한다. 투자사가 총제작비 50억원짜리 영화에서 수익을 거두려면 142만명 이상을 동원해야 한다. 지난해 6월 티켓 가격이 인상되면서 1인당 투자 배급사가 가져가는 금액은 평균 입장료 7600원에서 극장 몫 절반과 배급수수료 등을 제외한 3500원 정도.

지난해 개봉작 중 '백야행'(73만명)'마린보이'(82만명) '핸드폰'(62만명) 등은 100만명도 채 안됐다. 황정민이 주연한 '그림자 살인'(작년 4월 개봉)은 189만명을 기록해 스릴러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지만 손실을 봤다. 투자사 측이 거둔 티켓 판매 수입은 66억원에 달했지만 총제작비가 무려 81억원이었다. '작전'(작년 2월 개봉)도 151만명으로 입장 수입 45억원을 기록했지만 총제작비(52억원)를 충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작사 비단길 측은 "부가판권 판매실적이 양호해 손실은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인사동스캔들'(작년 4월 개봉)은 120만명으로 42억원을 거뒀지만 총제작비는 60억원에 달했다.

그나마 총제작비 20억원 미만의 저예산 스릴러인 김성홍 감독의 '실종'은 64만7000명으로 흥행수입 22억원을 거뒀다. 총제작비 19억2400만원을 투입한 홍기선 감독의 '이태원살인사건'은 52만7000명을 동원,5100만원의 순익을 실현했다.

지난해 스릴러물이 크게 늘어난 것은 2008년 '추격자'(513만명)가 대박을 터뜨린 후 투자 유치 봇물이 터진 결과다. 스릴러는 액션 대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으로도 잘 만들면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퍼졌다. 감독으로서는 강한 인상을 관객들에 남길 수 있어 선호하는 장르다.

그러나 흥행 성적이 이처럼 저조한 이유는 우선 시나리오가 '퍼즐 풀기'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있다. '살인의 추억'(510만명)이나 '추격자' 등 흥행 스릴러들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이나 유영철사건 등 사회적 이슈를 끌어안으면서도 장면마다 재미와 웃음을 줬다. 경제 침체기에는 심각한 영화보다는 코미디가 잘 된다는 속설과도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대박을 떠뜨렸던 재난물 '해운대'(1139만명),액션드라마 '국가대표'(337만명),코미디 '7급공무원'(404만) 등을 관통하는 코드는 웃음이었다. 살인을 주 소재로 한 스릴러는 성격상 웃음 코드를 가져가기 쉽지 않다해도 유머가 없어서는 흥행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싸이더스FNH 이화배 배급팀장은 "'추격자'를 최근 다시보니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대목들이 정말 많았다"며 "요즘 스릴러들은 '퍼즐 풀기' 외의 요소가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다. 스릴러물 흥행 여부가 방화(邦畵) 부활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