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삼성 '사업성 검토' 의 비밀…"실패가 도망가게 하라"
정미소와 운수업으로 큰돈을 벌자 자신감이 붙었다. 이번에는 부동산 투기로 눈을 돌렸다. 은행에서 돈 빌려 땅을 사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그는 불과 2년 만에 대구 인근에 200만평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됐다. 사람들의 부러움도 잠시,중일전쟁이 터지자 대출은 중단되고 땅값은 폭락했다. 1937년 일이다.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이 맛본 첫 번째 실패였다. 그는 깨달았다. "국내외 정세를 볼 줄 알아야 했는데 사업은 요행이 아닌 것을…."

오는 12일 호암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경제계에 '호암 배우기' 바람이 불고 있다. 호암은 술 설탕 섬유 가전 반도체 등 손대는 사업 대부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기업인으로서 호암 최고의 자산은 실패로 귀결된 사업들이었다. 호암은 생전에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모아 90개 항목의 '사업검토 지침'을 만들었다. 삼성은 지금도 신사업 진출이나 사업을 확대할 때 이 지침을 꺼내든다. 호암 경영의 비밀코드가 집약된 이 지침을 풀어본다.

◆과거 10년,미래 10년 모조리 검토하라

가장 먼저 검토하는 것은 사업내용이다. 기업의 경영이념과 목적에 부합하는지 여부다. 그 사업으로 큰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도 경영목표에 맞지 않으면 포기한다. 자칫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어 궁극적으로는 기업에 손해로 돌아올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이다.

또 품질 향상과 가격인하 효과 등을 감안해 국민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지도 검토 대상이다. 대기업이 할 만한 사업인지도 체크한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의 사업내용 검토는 최근 주요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윤리경영과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음은 사업환경 분석이 이어진다. 이 대목이 다른 기업과의 차별화 포인트라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선 과거 10년부터 향후 10년에 걸친 제품의 수급동향 및 전망을 모조리 파악한다. 물론 이는 국내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시장을 대상으로 한다. 실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삼성그룹 계열사 주재원들이 매일 보내는 각국 정보가 쌓여 신사업 진출이나 사업 확대시 중요한 기초자료로 활용된다.

또 단순한 수급동향뿐 아니라 경기와 투자자동향,기호변화,대체상품의 출시동향까지 면밀히 검토한다. 이 작업이 끝나면 국내외 경쟁사와 삼성의 강 · 약점 비교가 이뤄지고 핵심기술 개발이나 도입 가능성도 들여다본다.

신훈철 전 삼성코닝 사장은 "호암은 이런 지침을 실제 실천이라도 하듯 해외에 나온 책들을 직접 사서 읽고 성공한 기업은 물론 실패한 기업의 사례를 연구했다. 그리고 TV 프로그램이 좋은 것이 있으면 그 제작자까지 만나 이면의 얘기까지 들어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보를 중요시하는 삼성의 전통은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기둥까지 파보고야 나선다

사업내용 검토,환경분석이 끝나면 부문별 추진계획 검토단계로 넘어간다. 이 단계는 험난하기 짝이 없다는 평이다. 항상 불황을 전제로 경영계획을 짜기 때문이다. 악조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업구조를 도출하지 못하면 즉각 폐기된다. 실제 삼성의 수많은 사업 기획안이 이 단계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사업계획에서 투자자금 규모와 조달방법은 기본이다. 이어 설비를 효율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방안과 입지선정 작업이 이뤄진다. 공업용수 공급이 원활한지,전력 항만 시설은 괜찮은지,거점도시로부터의 소요시간 등이 입지 선정시 검토 대상이다.

원료나 설비공급 문제는 공급선의 다변화를 통해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지가 주요 포인트다. 자칫 한 곳에 의존할 경우 사업성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직원을 안정적으로 고용할 수 있는지와 폐수처리 및 공해문제 등도 치밀하게 검토한다. 해외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일 경우에는 대상국의 산업정책이 사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검토 대상이 된다.

이런 사업계획이 나오면 구체적인 시장점유율 계획과 사업을 책임지고 추진할 경영자가 확보돼 있는지가 중점적으로 다뤄진다.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효과는 물론이고 합작이나 인수시에는 대상 회사의 현황과 경영상태도 구체적으로 평가한다.

삼성 관계자는 "사업검토는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수차례 반복된다. 이 과정이 끝나면 담당자는 이미 해당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다"고 그 효과를 설명했다. 생전 호암도 신사업에 대해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기둥의 밑도 파보고 주위를 살펴가며 건너야 한다"고 말해 신중에 신중을 당부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