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들이 쓰다버린 슬리퍼나 헬멧,돌멩이조차도 사사로이 보이지 않아요. "

5일부터 28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는 광부 출신 화가 황재형씨(57)는 "그동안 강원도 태백 등지에서 광부들의 생생한 모습을 화면에 담아냈다면 최근에는 광부들이 살았던 산촌 풍경이나 골목길,텃밭처럼 서정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에 주저 앉아 작업을 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3년 만에 여는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쥘흙과 뉠땅'.손에 쥘 수 있는 흙을 씨줄로,누구나 누울 수 있는 땅을 날줄로 태백 탄광촌에 깃든 광부들의 삶을 묘사한 풍경화 60여점이 걸린다. 붓 대신 나이프를 활용해 유화 물감뿐 아니라 탄가루,흙 등을 거칠게 발라 사실적인 느낌을 살려냈다. 황씨는 소외된 탄광촌 주민들의 삶을 독특한 조형 예술로 형상화하는 리얼리즘 작가. 전라도 보성에서 태어난 그가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으로 이사 간 때가 1983년.당시 운동권 위장취업자라는 눈총을 받아가며 그 곳에 정착한 이후 28년간 삶의 터전이 된 태백을 뜨내기가 아닌 주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작업해왔다.

"광부 생활은 고무씹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광부들이 고무를 씹듯이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광산은 인생을 저당잡힌 공간 같거든요. 광산촌 막장처럼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곳이기에 삶의 오기가 배어 있는 곳 이기도 하고요. "

주름진 얼굴에 온통 탄가루가 묻은 주름진 광부의 얼굴,전등이 달린 헬멧을 쓰고 갱도 안에서 일하는 광부,광산에서 석탄과 돌을 선별하는 일을 하는 선탄부(選炭婦)의 모습들을 그린 인물화는 막장 안에서 그린 듯 생생하고 강렬하다.

"3년간 짧은 광부 경험을 했는데 도시의 삶에 익숙해서인지 '막장'의 처절한 감흥을 표현하기가 쉽지않더군요. 고작 광부의 작업복이나 주변 풍경 밖에 표현할 수 없어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

실제로 2000년 이후 근작에서는 광부들이 생활했던 태백 산촌 마을이나 골목 사이의 풍경과 같은 정황들이 자주 등장한다. 모퉁이를 돌아가면 금방 집이 나타날 듯한 고즈넉한 골목길이나 파가 자라는 조그마한 텃밭,황금빛 노을 속에서 달리는 퇴근길 버스의 모습,태양빛에 반사되는 양철지붕 집 등을 그린 그림들은 치열함을 덜고 그 대신 원숙함을 더한 느낌이다.

"탄광촌의 골목과 텃밭은 소박한 행복이 묻어 있어 좋은 소재로 활용합니다. 예전에 살았던 광부의 집이 바로 광부의 모습이고 표정이듯이 무심한 사물 하나 하나의 존재감이 때로는 상충되고 때로는 흡수되면서 제게 다가옵니다. "

철학과 예술의 시발점은 노동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노동의 진정한 가치는 행복에 있다"며 "잠자리가 편안한 사람들에게는 각성을,잠자리가 편치않은 사람들에게는 휴식을 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한 그는 일본의 반전 · 반핵 화가인 마루키 부부를 기념해 세운 마루키미술관의 개관 25주년 '젊은 아시아'전에 초대받기도 했다. (02)720-102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