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난만하고 이상주의적인 아기사슴'이란 긴 별명으로 2004년 스페인 국민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스페인 총리(사진)가 집권 이래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국민당(PP)의 마리아노 라호이 후보를 누르고 8년 만에 스페인에 좌파 정권을 재집권시키며 유럽에 사회주의 바람을 몰고 왔던 그는 치솟는 실업률과 최악의 경제난,눈덩이 재정적자에 발이 묶여 추풍낙엽 신세로 전락했다.

8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스페인 일간 엘 문도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사파테로 총리는 41%의 지지율을 얻는 데 그쳐 42.1%를 획득한 보수 야당의 라호이 당수에 체면을 구겼다. 집권 6년 만에 처음이다. 라호이 당수는 2004년과 2008년 총선에서 사파테로 총리에 밀려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현재 스페인은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라트비아 다음으로 높은 19%의 실업률로 사상 최악의 실업난에 시달리는 데다,작년 4분기(-0.1%)까지 7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에 빠져 있다. 여기에 국내총생산(GDP)의 11%로 불어난 재정적자로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되는 등 국가부도 위기와 2차 금융위기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FT는 "400만명에 달하는 살인적 실업난과 저성장,좌파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영이 사파테로 총리의 지지도를 끌어내렸다"고 전했다.

스페인 좌파 진영의 지지도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최근 사파테로 총리가 사회복지 급여 지출을 줄이기 위해 퇴직연령을 현행 65세에서 67세로 높이는 재정적자 감축안을 내놓으면서 좌파 진영에선 그가 초심을 잃었다는 비판 여론이 거세다. 스페인은 향후 4년 안에 재정지출을 500억유로가량 줄이고 2013년까지 재정적자를 EU 권고안인 GDP 대비 3% 이내로 줄이는 방안을 EU집행위원회에 제출했지만 EU 측은 현실성이 부족하다며 추가 감축안을 요구하고 있다.

스페인 언론도 등을 돌렸다. 지금까지 사파테로 정권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던 좌파 성향 일간 엘 페이는 2012년 치러질 차기 총선에서 집권 사회당이 37.5%의 득표율로 국민당(43.4%)에 크게 패배할 것으로 전망했다. 우파 성향 일간 ABC는 1면 전체를 할애해 '스페인은 정부가 필요하다'는 제하의 특집기사를 내보내며 비난 수위를 높이고 있다.

최근에는 오는 5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릴 예정인 미 · EU 정상회의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불참을 선언하면서 EU 순회의장을 맡은 사파테로 총리의 대표성을 훼손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백악관 측은 정상회의 불참이 오바마 대통령의 대외활동 축소 때문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지만 일각에선 2004년 총리 당선 당시 이라크전 철군 등을 주장하며 반미 성향을 보였던 사파테로가 미국으로부터 응징당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김미희 기자 iciic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