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치맛바람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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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뚤어진 교육열…그덕에 압축성장
못배워도 땀 흘린 노동자 잊지말길
못배워도 땀 흘린 노동자 잊지말길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주말 미국의 교육개혁을 주장하면서 한국을 본받아야 할 나라로 또다시 거론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유력 일간지인 더 타임스는 최근 과도한 사교육 열풍으로 인해 한국의 공교육이 실종됐다는 비판적인 보도를 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우리 교육이 가진 수많은 문제들을 생각하면 칭찬보다는 비판 쪽에 더 공감이 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찌됐건 한국의 높은 교육열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오죽하면 자녀들을 좋은 학군의 학교에 보내기 위해 위장 전입했다는 폭로가 공직 후보자들의 청문회가 열릴 때마다 어김없이 불거져 나오겠는가.
1960년대에는 '학구제(學區制) 위반'이라는 게 있었다.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거주지가 아닌 다른 학구의 학교에 보내는 것을 일컫는 용어였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명문 중학교 진학률이 전국에서 손꼽히는 곳이었다. 원래는 서울 혜화동 주변지역 거주자들만 다닐 수 있는 학교였지만 그러한 명성으로 인해 멀리는 우이동에서,가깝게는 삼선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네에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나도 그 학구제 위반 학생 중의 하나였다.
학구제 위반의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학구제 위반 여부를 가려내기 위해 수시로 가정 방문이 이뤄졌는데 그럴 때면 미리 연락을 받은 부모들이 학교 근처의 가정집 한 곳을 섭외해 마치 그곳이 자기 집인 양 연극을 해야 했다. 당시 학부모들의 교육열은 '치맛바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학부모들이 뻔질나게 학교를 드나들면서 자기 아이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해줄 것을 요청하곤 했는데 그 역할을 주로 어머니들이 맡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교실에서의 자리는 매우 중요했다. 100명이 넘는 콩나물시루에서 맨 뒷자리 구석진 곳에 앉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학부모들이 너도나도 몰려와서 부탁을 하니 그 모든 사정을 일일이 들어줄 수도 없고 학교로서도 상당히 난감했던 모양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한 가지 꾀를 냈는데 그건 아이들의 자리를 끊임없이 순환시키는 것이었다. 매일 옆으로 한 자리씩 옮기고 일주일에 한번은 뒤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 이동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된 아이들이 있었다. 바로 성북동 산동네 아이들이었다.
당시 그 학교의 학구는 혜화동,명륜동의 부촌뿐 아니라 성북동 위쪽에 위치한 이른바 '달동네'를 포함하고 있었다. 5 · 16 이후 정부가 산업화를 본격 추진하면서 이농정책을 폈고 그 결과 서울로 온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곳이 성북동이었다. 아직 일자리가 충분치 않을 때라 그들 가운데는 자녀들을 중학교에 진학시킬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반에 서른 명은 되었던 그 성북동 아이들은 4학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교실 뒷자리에 배치됐다.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대한민국이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초고속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이었고 그것은 바로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에서 비롯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학구제 위반이니 학군위반이니 하는 것들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중학교에 진학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감내했던 우리 시대 수많은 동년배들의 피와 땀이 없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제 곧 설날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옛 친구들을 만날 기회조차도 없다. 그러니 학구제 위반의 추억을 같이 나눈 친구들에게,그리고 늘 미안함이 앞섰던 성북동 친구들에게,지면으로나마 인사를 전해야겠다. 친구들아,잘 지내지?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
1960년대에는 '학구제(學區制) 위반'이라는 게 있었다.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거주지가 아닌 다른 학구의 학교에 보내는 것을 일컫는 용어였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명문 중학교 진학률이 전국에서 손꼽히는 곳이었다. 원래는 서울 혜화동 주변지역 거주자들만 다닐 수 있는 학교였지만 그러한 명성으로 인해 멀리는 우이동에서,가깝게는 삼선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네에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나도 그 학구제 위반 학생 중의 하나였다.
학구제 위반의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학구제 위반 여부를 가려내기 위해 수시로 가정 방문이 이뤄졌는데 그럴 때면 미리 연락을 받은 부모들이 학교 근처의 가정집 한 곳을 섭외해 마치 그곳이 자기 집인 양 연극을 해야 했다. 당시 학부모들의 교육열은 '치맛바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학부모들이 뻔질나게 학교를 드나들면서 자기 아이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해줄 것을 요청하곤 했는데 그 역할을 주로 어머니들이 맡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교실에서의 자리는 매우 중요했다. 100명이 넘는 콩나물시루에서 맨 뒷자리 구석진 곳에 앉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학부모들이 너도나도 몰려와서 부탁을 하니 그 모든 사정을 일일이 들어줄 수도 없고 학교로서도 상당히 난감했던 모양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한 가지 꾀를 냈는데 그건 아이들의 자리를 끊임없이 순환시키는 것이었다. 매일 옆으로 한 자리씩 옮기고 일주일에 한번은 뒤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 이동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된 아이들이 있었다. 바로 성북동 산동네 아이들이었다.
당시 그 학교의 학구는 혜화동,명륜동의 부촌뿐 아니라 성북동 위쪽에 위치한 이른바 '달동네'를 포함하고 있었다. 5 · 16 이후 정부가 산업화를 본격 추진하면서 이농정책을 폈고 그 결과 서울로 온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곳이 성북동이었다. 아직 일자리가 충분치 않을 때라 그들 가운데는 자녀들을 중학교에 진학시킬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반에 서른 명은 되었던 그 성북동 아이들은 4학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교실 뒷자리에 배치됐다.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대한민국이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초고속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이었고 그것은 바로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에서 비롯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학구제 위반이니 학군위반이니 하는 것들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중학교에 진학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감내했던 우리 시대 수많은 동년배들의 피와 땀이 없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제 곧 설날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옛 친구들을 만날 기회조차도 없다. 그러니 학구제 위반의 추억을 같이 나눈 친구들에게,그리고 늘 미안함이 앞섰던 성북동 친구들에게,지면으로나마 인사를 전해야겠다. 친구들아,잘 지내지?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