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자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통섭의 기술》에서 통섭에 관한 기존의 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특히 지식의 범주에 국한된 된 윌슨의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통섭은 지식이 아니라 지성 차원에서 일어난다"고 강조한다.
최 교수는 '통섭'이라는 용어부터 재정의한다. 기존의 논의는 통섭을 한자로 '統攝(거느릴 총,몰아잡을 섭)'이라 쓰고 '큰 줄기를 잡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최 교수는 '通涉(통할 통,건널 섭)'으로 썼다. 통섭이란 어떤 것을 중심으로 체제를 재편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의 경계가 허물지고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윌슨의 《통섭》 번역서 서문에 나오는 '설명한다,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이분법적 견해라고 비판한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존재'가 나의 생각을 존재와 동일시하는 에고로서의 존재이듯이,'설명하는 존재'로서의 번역자 또한 설명을 존재와 동일시하는 에고로서의 존재라는 것.에고는 분리의식이며,분리의식으로는 통합을 논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분리의식으로 통섭을 논하고자 한다면,통섭은 그야말로 다학문적 유희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비판은 신랄하기까지 하다.
최 교수는 지적 영역을 넘어 전일적 지성 차원의 통섭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지성은 참 자아의 영역이며 통섭은 '다양한 지식체계를 넘나드는 지식 차원의 기술이 아니라 대립되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자의식을 융섭하는 지성 차원의 영적 기술'이다.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다고 통섭이 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관통하는 핵심원리를 알아야 실제 통섭이 이뤄진다는 것.
그러나 윌슨이 말하는 '지식의 통일'은 의식계와 물질계의 상관성을 인식하지 못해 직관적인 앎을 배제하고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사물의 현상적 측면과 관련된 감각적 · 지각적 · 경험적 판단 영역만 중시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자연과학 중심의 학문적 제국주의를 초래했고,통섭을 논하면서 통섭에 반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서양의 분석적 사고와 동양의 종합적 사고가 융합할 때 비로소 완전한 통섭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우주의 본질인 생명에 대한 온전한 앎을 높여가는 것이야말로 통섭의 영적 기술을 향상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며 통섭적 마인드로 '하나됨'을 실천할 때 인류의 새로운 문명이 시작된다고 예견한다. 그 출발은 바로 참자아인 영성을 자각하고 마음을 비워 '해방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