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자동차 시장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지난해 글로벌 판매량 4위에 올라선 현대자동차에도 '닥터 둠(Dr. Doom·비관론자)'이 있었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KARI) 소장을 맡고 있는 박홍재 현대차 전무는 지난 9일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에서 열린 '자동차산업 환경 변화와 2010년 주요 이슈' 세미나에서 세계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대해 시종일관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오늘과 내일을 가늠하는 박 전무의 목소리에는 우려가 가득했다. 그는 "신흥시장의 확대와 친환경차 개발 속 글로벌 자동차 산업이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며 "저상장·저수익 구조가 지속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최악 벗어나…저성장·저수익 우려

박 전무는 우선 세계 자동차 시장이 '최악의 국면'은 벗어났다고 평가했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수요가 바닥을 치고, 미국 '빅3'인 제너럴모터스(GM)와 크라이슬러가 구제금융을 받으며 빈사상태에서 모진 숨을 이어가야 했던 지난해보다는 나아질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박 전무는 글로벌 자동차산업이 100년 만의 '대전환기'를 맞았지만, 지난해를 기점으로 급격히 진행 중인 산업 환경 변화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업계는 만만치 않은 부침을 겪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의 전망인 '저성장·저수익 구조'의 논리는 이렇다. 자동차가 전세계적으로 공급과잉인 상태에서 자동차 업체들은 중국, 인도 등 신흥시장 중심으로 성장하게 된다. 품질에 대한 기대치가 낮고 저가의 소형차를 선호하는 신흥시장의 특성상 업계는 '박리다매'와 같은 저수익 구조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게 박 전무의 설명이다.

신흥시장 확대, 대응책은 '더블 스탠다드'

그럼에도 업계들이 신흥시장을 외면할 수 없는 까닭은 올해 이 시장의 판매비중이 50%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박 전무는 강조했다.

박 전무는 "독일 폭스바겐과 일본 스즈키의 제휴를 비롯, 최근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 간의 활발한 합종연횡은 소형차 전문 메이커와의 제휴를 통해 신흥시장에서의 입지 강화를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고 해서 품질 문제를 도외시할 수 있을까. 최근 일본 도요타의 대규모 리콜(결함시정) 사태로 인해 품질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쉽지 않은 일이다. 박 전무는 이에 대해 "자동차업체로서는 어려운 문제"라고 토로했다.

박 전무가 제시한 대응책은 '이중기준(더블스탠다드)'이었다. 선진시장에는 좋은 품질의 차를 내놓고, 신흥시장에서는 저렴한 가격을 내세우는 방침이다. 다만 이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계획을 박 전무는 밝히지 않았다. "새로운 소비 주도세력의 니즈(needs)를 어떻게 충족시키느냐"가 과제로 남았을 뿐이다.

◆친환경차 개발 방향, 중국이 가리킨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자동차 산업의 최대 변수는 단연 "세계 최대 자동차 수요국으로 떠오른 중국"이며, 구체적으로는 "중국 정부의 친환경차에 대한 정책"이라고 박 전무는 강조했다. '하이브리드카 대(對) 전기자동차'의 형세를 띄고 있는 글로벌 업체들의 친환경차 접근법도 중국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박 전무는 지난해 일본에서 도요타 '프리우스', 혼다 '인사이트' 등이 일반 승용차 판매량 상위권에 진입하며 적어도 일본에서만큼은 친환경차가 양산차의 범주에 진입했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일부 자동차업체에서 전기차의 양산화를 추진하고 있어 '어떤 차가 대안이냐'를 두고 업계에서는 숱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박 전무는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라면서도 "(현대차가 2030년까지 전기차 본격 양산을 미룬다는 일부 보도에 대해) 알려진 바와 달리 전기차 개발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못 박았다. 현대차는 올 하반기 첫 번째 가솔린 하이브리드카를 시작으로 하이브리드카의 본격 양산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박 전무의 말은 현대차가 적어도 '양자택일'로 진로를 결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풀이된다.

◆'공격 경영' 신중해야

지난해 글로벌 자동차시장에서 현대차는 놀라운 실적을 기록했다. 반면 대규모 리콜사태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도요타는 독일 폭스바겐에게 세계 1위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 현대차와 같은 추격업체에게는 기회라는 의견들도 나온다. 이에 대해 박 전무는 "현대차에게 있어서는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하는 게 당연하다"며 "공격적으로 시장 점유율 확대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박 전무는 신중론을 견지했다. 현대차의 '공격 경영' 선포에 대해 그는 "그게 적절한 지는 평가하기 어려운 위치"라고 단서를 단 후 "얼마나 경영을 잘 하느냐에 달려있고, 또 공세에 나서는 게 옳은지 그른지 미리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 전무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되면 여러 이슈가 생길 수 있다"며 "(현대차 뿐만 아니라) 어떤 업체라도 그런 문제를 얼마나 잘 대응하는 지가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이를 위해서는 "시장의 변화를 재빨리 감지하고, 생산 현장에서는 유연성을 발휘해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며 "노사관계와 제품개발의 유연성도 중요하다"고도 덧붙였다.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된 이날 세미나에서 박 전무가 몸담고 있는 현대차에 대한 '장밋빛 전망'은 없었다. 급변하는 판도 속에서 절차 부심하는 업계의 고뇌만이 느껴졌을 뿐이다.

박 전무가 이날 쏟아낸 부정적인 전망은 지난 2008년 말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언하며 특유의 비관론으로 '닥터 둠'이란 별명을 얻었던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경영대학원 교수를 떠올리게 했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자동차산업연구소가 현대차의 '싱크탱크'라는 점을 감안하면, 박 전무는 그야말로 '현대차의 닥터 둠'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날 세미나에는 취재진 외에도 적지 않은 수의 현대기아차 임직원들이 자리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 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실적을 올렸음에도 때 아닌 '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쓴 약이 몸에 더 좋다고 했던가.

한경닷컴 이진석 기자 ge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