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 초 한국중공업의 신임 기획조정실장이 서울 강남 뱅뱅사거리의 본사 빌딩에 들어섰다.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직전까지 ㈜두산 상무를 지냈던 박지원 현 두산중공업 사장(45)이었다. 당시 한국중공업을 인수한 두산그룹은 박 실장을 경영권 인수 준비팀장 격으로 전보발령을 냈다. 한국중공업 측에서 보면 '점령군' 사령관이기도 했다.

우려했던 대로 첫 출근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점령군'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몇 간부들에게 회사 현황을 담은 자료를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경영진도 비슷한 태도였다. 게다가 노동조합은 파업을 들먹이며 업무방해에 가까운 텃세를 부렸다. 컨설팅 업체인 맥킨지와 함께 '인수 후 통합작업(PMI)'을 마쳐야 했지만 좀처럼 진척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박 실장은 도저히 안되겠다고 판단했다.

2003년 초 그룹 내에서 주류사업을 맡았던 김대중 사장을 두산중공업 최고경영자(CEO)로 전격 영입했다. 김 사장은 인화와 추진력을 겸비한 경영자로 손꼽히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공기업 체질을 뜯어고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김 사장은 정말 노련하고도 세심하시더군요. 일하는 방식과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어요. 제 입장에선 사람을 통해 사람 문제를 해결하는 노하우를 터득한 계기가 됐습니다. "

◆대학 모범생,기업 구원투수로

박 사장은 스스로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다"고 말한다. 몸에 밴 '모범생 DNA' 탓이다. 엄격한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매주 일요일 할아버지인 고(故) 박두병 두산 초대 회장이 살던 서울 연지동 집에 들러야 했다. 할아버지는 두려운 존재였다. 당시 아버지인 박용곤 명예회장을 비롯해 고 박용오 전 회장,박용성 대한체육회장,박용현 그룹 회장,박용만 ㈜두산 회장,박용욱 이생그룹 회장 등은 형제끼리 모여 있을 때도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고 한다.

초등학생인 박 사장이 또래인 사촌형제들과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연세대 경영학과) 시절에는 소위 '땡땡이' 한 번 친 적이 없었다. "그때는 학생이 수업을 빼먹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고지식했어요. "

박 사장은 1988년 동양맥주에 입사했다. 이후 글로벌 광고대행사인 맥켄 에릭슨,두산 미국법인인 두산아메리카 등을 거치며 실무를 익혔다. 그에겐 실무 자체가 살아 있는 경영수업이었다. 1997년에는 외환위기 여파로 어려움을 겪던 두산상사 이사로 발령이 났다. 처음 맡은 업무는 구조조정.박 사장은 손실이 커진 수출 대행업무를 줄이는 대신,원자재 수출입 등 새로운 사업 발굴에 나섰다. "상사 재직 시절 그룹 전략기획본부에 있던 박용만 회장으로부터 정말 혼이 많이 났어요. 제 인생의 멘토 같은 분이에요. "

박 사장은 2008년 두산중공업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2002년 17%에 불과했던 해외 수주 비중을 2008년 70%로 늘리고,중동지역 담수 플랜트 분야에서 시장 점유율을 40%로 끌어올린 성과를 인정받은 덕분이었다.

◆"요행은 없고,원칙은 있다"

박 사장은 올해 결혼 21년 차다. 1990년 서울대 미학과 출신 여성과 1년 반의 열애 끝에 인연을 맺었다. 5년 전부터는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있다. 자연스레 임직원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회의도 잦다. 보통 임원별,팀별로 5~6명가량을 모아 수시로 회의를 진행한다. 가족 대신 회사에서 직원들 보는 낙이 생겼다는 우스갯소리가 절로 나온다.

임직원들과의 회식도 잦은 편이다. 회식 때면 박 사장은 어김없이 소주나 소맥(소주+맥주) 폭탄주로 파도타기를 한다. 순서대로 공평하게 마실 수 있어서다. "주량은 소주 3병입니다. 그런데 회식 때마다 항상 제가 먼저 취하더라고요. 혼자 여러 직원들과 잔을 주고받아서죠.그래서 고민 끝에 파도타기를 했습니다. 물론 술이 약한 직원은 빠질 수 있도록 해놓았죠.그런 면에서 파도타기는 공평하고 '원칙'이 살아 있는 주법이죠."

박 사장의 비즈니스 좌우명은 '요행은 없다'이다. 노력하고 뿌린 대로 거둔다는 생각에서다. 한국중공업 인수 이후 노조와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무노동-무임금 원칙을 끝까지 고수,매년 반복되던 노조의 파업에 종지부를 찍은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두산중공업 노조는 2002년을 전후로 강도 높은 파업을 벌였지만 정공법을 택한 박 사장을 넘어설 순 없었다.

"당시 노조원의 파업에 따른 무임금 원칙만은 끝까지 지켰습니다. 상황이 시끄러워지자 주변에선 포기하고 좋게 넘어가자는 의견도 많았지만,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노조가 포기했죠.그 후로 파업이 사라졌습니다. "

이 같은 노사관계의 질적 변화는 2000년대 초 매출 2조원짜리 회사가 매출 8조원으로 도약하는 데 밑거름 역할을 해냈다는 평이다. 민영화된 국내 공기업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정신적 보스'YK',업무적 보스'YM'

2008년 가을 어느 날 박 사장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두산 본사 빌딩 33층에 있는 박용만 회장의 집무실에 급히 들어섰다. 박 사장은 들어가자마자 "스코다 파워 인수를 추진해야 할 것 같다"고 잘라말했다. 당시 두산중공업 내부는 체코 터빈업체인 스코다 파워 인수 추진 여부를 두고 찬반양론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그룹 및 두산중공업 일부 임원들이 인수 계획을 백지화해야 한다고 말렸다. 하지만 박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이 기회를 놓치면,터빈 분야의 원천기술을 보유한 스코다 파워 같은 기업을 인수할 기회는 영영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정말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스코다 파워 인수에 대한 이견이 워낙 팽팽하게 대립했으니까요. 그런데 의외로 박용만 회장이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시더라고요. 그땐 정말 짜릿했습니다. "

결국 두산은 근 1년간의 가격 협상 절차 등을 거쳐 작년 9월 스코다 파워 인수에 성공,세계적인 발전설비 업체로 거듭났다. 박 사장은 "업무상 보스가 YM(박용만 회장)이라면,정신적인 보스는 아버지인 YK(박용곤 명예회장)"라고 말한다. 박 명예회장이 엄격했던 할아버지와 달리 항상 인자하고 따뜻한 지원자인 동시에,회사 안팎에 대한 얘기를 격의 없이 나눌 수 있는 친구 같은 존재여서다.

◆"지구의 가치를 높여라"

'지구의 가치를 높이는 곳'.박 사장이 두산중공업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지구의 가치를 높이는 기술'은 두산중공업의 최근 신문 및 방송 광고 카피이기도 하다. '기업은 돈도 많이 벌어야 하지만,동시에 인류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두산중공업은 주로 중동,인도,태국 등 개발도상국에 발전 및 담수화 설비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들에 필요한 전기와 물을 공급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보람이죠."

박 사장은 앞으로 원자력 발전 분야에 두산중공업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보고 있다. 화력발전 역시 앞으로 수십년간 인류에 필요한 사업이지만,이산화탄소 절감 문제를 놓고 보면 원전 비중이 점점 커질 것이란 판단에서다. 그런 면에서 작년 말 아랍에미리트(UAE)에서의 대규모 원전 수주는 두산중공업의 미래를 바꿔놓는 변곡점이 됐다는 게 박 사장의 생각이다.

"올해 창사 114년을 맞은 두산이 200년 기업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도록,두산중공업이 그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하도록 한다는 게 개인적인 꿈이기도 합니다. "

장창민/박민제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