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 미스매치를 풀자] (1) 대졸 뽑으니 3개월을 못버텨…中企 "명문대 출신 사절"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1) 中企ㆍ지방 기피 심각하다
150만원 중소기업 정규직보다 100만원 받더라도 "대기업"
공고낸지 6개월 지나도 지원자 '0'…인력 충원 못해 주문 거절하기도
150만원 중소기업 정규직보다 100만원 받더라도 "대기업"
공고낸지 6개월 지나도 지원자 '0'…인력 충원 못해 주문 거절하기도
#사례1.2년 전 서울에 있는 H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던 윤기석씨(가명 · 30)는 얼마 전 어렵게나마 처음 취직한 중소기업을 한 달 만에 때려치우고 다시 '백수'로 돌아왔다. 대기업 공채에서 줄줄이 낙방한 데다 나이도 꽉 찬 만큼 'G사에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입사했지만,막상 회사에 다니다 보니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를 백수로 내몬 결정타는 연봉(약 2000만원)이 아니었다. 이보다는 중소기업에 취직했다는 이유로 마치 '인생 실패자'처럼 대하는 친구들과 친척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윤씨는 "무능한 사람으로 비치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며 "취업을 1~2년 늦추더라도 다시 대기업에 도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례2.중소 의류 수출업체인 코트리오트레이딩은 지난해를 끝으로 더 이상 '인-서울(in-Seoul)' 대학 출신을 채용하지 않기로 했다. 매년 2명씩 서울 소재 대학 의상학과 졸업생을 뽑았지만 대부분 2년을 채우기도 전에 회사를 떠났기 때문이다. 코트리오트레이딩에서 배운 경험을 토대로 '더 큰 무대'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싶다는 게 이들의 퇴사 이유였다. 김병환 사장은 "돈과 시간을 들여 신입사원에게 일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이 결국 (이들이 경력직으로 입사할) 대기업에 좋은 일만 시켜준 셈"이라며 "더 이상 손해보는 장사는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대기업에 눈높이가 맞춰진 구직자들은 중소기업이 마음에 안 차고,중소기업은 힘들여 뽑아 봤자 호시탐탐 대기업행만 노리는 고학력 구직자를 꺼리는 모습.이런 사정을 뻔히 알지만 이렇다 할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정부.사상 최악의 청년 실업난 속에서도 중소기업은 일할 사람을 못 구하는 인력 미스매치를 둘러싼 요즘 풍경이다.
◆"150만원 중기보다 100만원 대기업"
경기도 안양에 있는 전열기구 제조업체인 웰쿠킹하이텍의 김남국 인사총무팀 부장은 최근 들어 매주 3~4차례 신입사원 면접을 보고 있다.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려면 상시 부족 인력 15명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김 부장은 이미 지난해부터 '1년 이상 버틸 만한 사원을 최대한 많이 뽑으라'는 사장의 특명을 받은 상태.하지만 작년 말 사무관리직으로 뽑은 신입사원 5명이 3개월 만에 사표를 던지면서 오히려 상시 부족 인력은 더욱 늘었다. 김 부장은 "구인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 입장에서 청년 실업난은 남의 나라 얘기"라며 "구직자들이 눈높이를 낮추지 않는 한 미스매치 문제는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 취직을 꺼리는 분위기는 대학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학생이 몰리는 대기업 주최 채용 설명회와 달리 중소기업이 여는 설명회는 거의 예외없이 파리만 날린다는 것.실제 세종대는 중소기업 채용 설명회에 학생들이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자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지난해에는 아예 중기 채용 설명회를 갖지 않았다. 명지대 역시 지난해 상반기에 중기 채용 박람회를 열었지만 학생들의 반응이 없자 하반기에는 구직자와 구인 회사를 1 대 1로 연결해 주는 방식으로 바꿨다.
윤경희 서울고용안정센터 취업지원과 팀장은 "취업 지원자 대부분이 월 150만원 받는 중소기업 정규직보다 월 100만원 받는 삼성 파견직을 선호한다면 할 말 다 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중소기업 중에서도 지방에 있거나 생산직 인력이 부족한 기업들의 상황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처지다. 경기도 평택에 있는 비철금속 제조업체 디엠아이가 대표적인 예다. 이 회사는 올 들어 웬만한 신규 주문은 받지 않는 '배짱'영업을 하고 있다. 현재 인력(134명)으로는 기존 고객의 주문량인 월 200t 생산도 벅차기 때문이다. 생산인력 채용 공고를 낸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생산직은 싫다","서울에서 너무 멀다"는 구직자들의 반응만 돌아올 뿐이었다.
◆'인-서울' 대학은 사절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가전부품 제조회사 한국정밀의 박훈군 대표는 최근 황당한 경험을 했다. 얼마 전 뽑은 대졸 신입사원 3명에게 무거운 짐을 옮기라고 지시했더니 다음 날 바로 사표를 낸 것.박 대표는 "대다수 중소 제조기업들은 바쁠 때 사무직 직원들에게도 '몸으로 때우는 일'을 가끔 시킨다"며 "다른 대졸 출신들도 '자존심 상해서 이런 일은 못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는 대졸 출신을 뽑지 않을 방침"이라고 말했다.
청년 구직자들의 '눈높이'는 중소기업에 입사한 뒤에도 내려가지 않는다. 다니는 중소기업에 마음을 붙이지 않고 더 좋은 조건의 회사를 찾아 끊임없이 구직 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상대적으로 대기업으로의 전직 가능성이 높은 '인-서울' 대학 출신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앞다퉈 영입해도 부족할 인-서울 대학 출신 구직자를 오히려 많은 중소기업들이 꺼리는 이유다.
금속제품 제조업체인 한국OSG 관리팀의 이상택 과장은 "기본 자질만 있으면 회사 생활을 하면서 웬만한 것은 다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명문대 지원자보다는 열정을 갖고 오랫동안 함께 일할 수 있는 평범한 대학 출신자를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다른 문제는 고학력 구직자들의 '중소기업 탈출 러시'가 선의의 피해자를 낳고 있다는 점이다. 고학력 구직자들의 잇따른 이직을 경험한 중소기업이 이들을 아예 서류전형에서부터 걸러내자 실제 눈높이를 낮춘 고학력 구직자들까지 취업을 할 수 없어서다. 고려대를 졸업한 박준서씨(가명 · 29)는 "토익 점수와 학점이 낮아 대기업 입사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취업이 급한 만큼 중소기업의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뜻대로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오상헌 · 손성태 기자/백상경 · 김기정 인턴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