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갈 직장이 없는 것은 고통이다. 갑자기 퇴직한 사람들이 산에 가는 건 어디라도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회사원에겐 집에 있는 것 자체가 일 없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생각이 적어도 올 하반기부터는 깨지게 됐다.

정부 계획에 따르면 하반기부터 공직 사회에 유연근무제가 도입된다. 집에서 근무할 수도 있고 집 근처에 마련된 '스마트 오피스'라는 공동 사무실에서 일할 수도 있다. 업무 시간도 탄력적으로 조정해 주40시간 범위 내에서 며칠 몰아서 근무할 수 있게 된다. 정부가 제도화한다는 것이 의미 있다. 이제 '집에서 일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것이다.

성과가 금방 날지는 미지수다. 출산으로 육아부담이 갑자기 생겼거나 몸이 불편하지 않는 한 재택근무를 신청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나올지 궁금하다. 지금도 '눈 도장'을 찍기 위해 근무지를 벗어나 서울행 기차를 자주 타는 공직 문화에서 집에서 '쉬는' 것을 택할 사람이 과연 많을까.

분명한 것은 이제 집에서 일할 때도 됐다는 사실이다. 이미 회사 일을 빼고는 은행 일도, 관공서 업무도 집에서 볼 수 있는, 아니 걸어다니면서도 가능한 시대가 아닌가.

유연근무제가 성과를 거두려면 두 가지 고려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신뢰를 바탕으로 근무 관행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평가도 결과 중심으로 가야 한다. 직접 대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직무설계도 전제돼야 한다.

두 번째 이왕 유연근무제를 도입하려면 정보기술(IT)을 적극 활용하는 계획을 동시에 세워야 한다. '집에 있는' 컴퓨터를 쓰면서 e메일로 때우는 식이면 곤란하다. 인터넷 인트라넷 모바일 등 최신 디지털 기술을 접목시킬 수 있어야 근무 효율성과 경제적 가치를 동시에 높일 수 있다.

마침 성공사례가 있다. 영국의 다국적 기업인 BT가 실시하고 있는 유연근무제다. 이 회사의 유연근무제는 자극적인 이름이 더 유명하다. 바로 '애자일 워킹(agile working)' 즉 민첩근무제다. BT가 이 제도를 도입한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는 직원 개인에게 가장 적합한 근무제도를 찾아주자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실천하겠다는 회사 차원의 고려였다.

BT의 전 세계 10만여 근무자 가운데 1만2000여명이 집에서 일하고 있다. 6만5000명은 다른 유연근무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2007년의 경우 전 직원이 전화나 인터넷 혹은 비디오로 회의한 건수만 75만건에 달했다. 성과는 놀라웠다. 생산성이 31% 높아졌고 고객만족도가 8% 상승했다. 직원 결근율이 63% 줄었고 종업원 만족도는 14% 높아졌다. 출산 휴가 후 복귀율이 90%에 달했는데 이는 영국 기업 평균 70%에 비해 큰 차이가 나는 수치다.

BT는 통신 · 서비스 회사답게 처음부터 철저히 IT와 접목시켜가며 이 제도를 정착시켰다. 이왕 집에서 일하는 시대를 열려면 IT와의 고려를 염두에 두고 추진해야 한다. 그래야 특정 집단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민첩하고 효과적인 사회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제도로 유연근무제가 뿌리내릴 수 있다. 진정한 IT선진국의 면모를 과시할 수 있는 부수입도 생긴다.

권영설 한경아카데미 원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