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영광'이었던 88올림픽과 '국가의 수치'였던 밑바닥 인생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역전의 기쁨은 쉽게 누릴 수 없다는 것,그래서 일말의 희망을 품기도 전에 터무니없는 점수나 기량 차로 패배하기 일쑤라는 것.

소설가 배지영씨(35 · 사진)의 첫 소설집 《오란씨》(민음사)의 표제작 <오란씨>는 상큼한 제목과는 정반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배씨의 신춘문예 등단작이기도 한 <오란씨>에는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동네 모래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그'는 어린 시절 이복형과 함께 폭력적인 아버지를 도와 공중변소 이용료를 받으며 지낸다.

그런데 당시 전국을 들뜨게 한 88올림픽은 모래내에 보신탕이나 사창가 등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것들을 쑤셔넣는다. 덕분에 몸을 팔며 살아가는 여자 설희도 모래내에 나타난다. 음료수 오란씨의 청순한 광고모델을 닮은 설희를 보며 두 형제는 아름다운 꿈을 꾼다.

그러나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 드려요. 오오 오란씨'는 CM송의 환상일 뿐이다. 그들에게 하늘은 너무 멀었다.

<오란씨>는 세 남녀의 비극을 88올림픽과 음료수를 통해 정교하게 구성해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도 올림픽에 열광한다. 하지만 방식이 약간 달랐다. '그'는 육상 경기에서 불꽃튀는 대결을 벌였던 두 선수,벤 존슨과 칼 루이스 중 벤 존슨을 고집스럽게 응원한다. 질 것이 예상되는 선수나 팀을 응원하다가 역전의 기쁨을 맛보는 게 '그'의 낙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벤 존슨이 승리하긴 하지만 약물복용 의혹으로 금메달을 박탈당한다. 벤 존슨의 낙마는 '그'의 형편없었고,형편없고,형편없을 삶의 예고편이다.

배씨는 "어릴 때부터 패배의식에 젖어있던 '그'는 지는 사람을 자신과 동일화해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제목이기도 한 '오란씨'는 중층적인 역할을 한다. 형제의 꿈인 설희이기도 하고,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더 마르지만 탐닉할 수밖에 없는 희망이기도 하고,소외된 자들의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오렌지 맛을 내면서도 파인향이나 애플향을 내는 오란씨는 향과 맛이 서로 다른 이질적인 음료수죠.추구하는 삶과 누추한 현실 사이의 간극이 있는 사람들과 비슷해요. "

소설집에 함께 실린 '슬로셔터' 연작 세 편은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를 잡아냈다. <버스-슬로셔터 No.1>에는 버스기사에게 성폭행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여성,<몽타주-슬로셔터 No.2>에는 옆집 연쇄살인범의 공범을 무서워하는 호텔 도어맨,<파파라치-슬로셔터 No.3>에는 비열한 행동으로 손가락질당할까 걱정하는 파파라치가 나온다.

이들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지만 도무지 물리칠 수 없다. 배씨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도 살짝 벌어지는 틈새같은 두려움에 시달리는 현대인을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인물들의 고용 불안증은 현대인의 대표적인 고통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