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5년 전 일이다. 당시 촉망받는 무용수이자 '발레 공식 커플 1호'였던 김인희씨와 제임스 전 부부는 동료들과 합심해 "우리 앞으로 대형 사고 좀 칠게요"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민간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SBT)' 창단식에서 이들은 마냥 들떴고 기뻤다. 이들 앞에 첩첩산중 가시밭길이 대기하고 있다는 예상도 못한 채.그로부터 15년,척박한 환경에서도 '고난의 행군'을 멈추지 않았던,용감무쌍했던 발레 커플은 여전히 행복할까.

창단 15주년 전날인 18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인희 SBT 단장(47)과 제임스 전 SBT 상임안무가(51) 부부는 즐거워보였다. 서로 "그때 나좀 말리지 그랬어"라고 타박하면서도 "후회는 안 해!"라고 외쳤다. 자식이 없는 부부에게 발레단은 효도를 하든 말썽을 부리든 소중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는 우리 부부에게 창단은 불행의 시작이었죠.(웃음) 현실을 몰라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죠.'발레를 대중에게 알리려면 왕래가 잦은 신사동에 차려야겠다'란 생각에 그 비싼 건물 한 층을 통째로 빌려버렸다니까요. 그 돈으로 외진 곳에 건물 하나 샀으면 됐을 것을.그래서 당시 제가 필리핀 재벌 2세한테 시집갔다는 소문까지 돌았어요. "(김 단장)

"돈 때문에 쩔쩔매도 우리끼리 이런 말을 해요. SBT 안하고 돈 많이 벌었으면 둘 중 하나가 아파서 그 돈 다 병원에 쏟아부었거나 속을 엄청나게 썩이는 아이를 낳았을 거라고.힘들어도 잘 했다고 생각해요. "(전 안무가)

김 단장과 전 안무가는 객원무용수의 신분으로 김 단장을 만났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2년 후인 1989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운명공동체가 된 이들은 1994년 일에서도 한 배를 타기로 작심했다. 1995년 2월 SBT 창단식을 열었고 같은 해 6월 첫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혹독한 자금난에 시달리면서도 창작 가족발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전씨의 한국적인 재해석이 돋보이는 '호두까기 인형'과 'she,지젤',최장기 발레 공연 기록을 세운 '창고' 등 수작을 발표했다. '생명의 선' 등은 미국 발레단에 팔리기도 했다. 그동안 무대에 올린 작품 수는 소품까지 합쳐 90여 개에 달하며 대부분이 창작 발레다. 전씨가 안무한 작품이 그중 80%에 달한다. 발레의 한국적인 해석을 추구하는 전씨는 "그래야 한국인도 외국인도 좋아하는 발레가 된다"란 지론을 펼쳤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창작발레의 활성화와 발레의 대중화를 내세운 SBT에는 여러 번 위기가 찾아왔다. 2002년에는 5개월 정도 발레단 문을 닫았다. 지난해에는 구조조정을 하고 직원과 단원 임금을 30~40% 깎는 것도 모자라 부부의 부수입까지 쏟아부어야 했다. 김 단장은 가장 가슴아팠던 순간을 이렇게 설명했다. "발레단의 생존을 위해서 여건이 안되는 상황에서도 공연을 했던 적도 있어요. 발레할 때 바닥 상태가 정말 중요한데,잔디밭이나 아크릴 위에서 단원들이 발레 공연을 해야 했죠.공연 내내 초조해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저러다 누구 하나 다치면 평생 나 자신을 미워할 것 같아서."

그럼에도 부부는 창작 발레의 대중화를 꿈꾼다. 발레를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갈 생각이다. "1976년 영국 로열발레단 내한 공연이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노점상으로 뒷바라지하는 상황에서 언감생심이었죠.먼 친척의 도움으로 음향실에 숨어서 공연을 봤어요. 그래서 SBT의 티켓 가격은 저렴하게 책정합니다. "(김 단장)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