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2 조카는 나와 키가 같다. 창피한 얘기지만 등을 맞대고 키를 재보면 조카 엉덩이가 내 허리에 닿는다. 청바지를 사면 나는 세탁소로 달려가지만,조카는 밑단을 줄일 필요가 없다. 요즘 젊은 세대는 서양인에 견줘도 꿀리지 않는 골격이다. 형제 많은 집에서 늘 먹는 것이 투쟁이던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부모들보다 한 뼘은 더 크다. 영양 부족으로 다리가 휘거나 광대뼈가 튀어나온 모습도 드물다. 성형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멋지고,늘씬하고,예쁘다. 한 마디로 '때를 벗은 세대'다.

젊은이들의 확 달라진 모습은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뚜렷이 확인된다. 경기에서 당당하고,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인터뷰나 타국 선수들 틈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는다. 메달을 딴 이승훈 이정수 모태범 이상화 등은 물론 김연아 박태환 신지애 이청용 이용대까지 한결 같다. 이들은 모두 서울올림픽 직후 1988~1990년 사이에 태어난 '올림픽 베이비'다. "성공이란 못을 박으려면 끈질김이란 망치가 필요하다"는 모태범의 블로그 글처럼 성숙하고,이상화의 발바닥 굳은 살처럼 목표지향적이다.

한국사에서 유례가 없던 '신인류'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100년 전 나라를 잃고,60년 전 동족상잔을 겪고도 이만큼 먹고 살게끔 만든 앞선 세대들의 피와 눈물과 땀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산업전사와 새마을운동 세대가 가난을 몰아내고 4 · 19,386세대가 독재 정권과 싸운 덕이다. 그 토대 위에서 자란 신인류는 IT 세례를 흠뻑 받고 세계의 변화를 리얼타임으로 체득했기에 이제는 세상을 앞질러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젊은 세대의 당당함만큼이나 21세기 한국의 위상도 달라졌다. 20세기 말 외환위기로 몰락해가던 나라가 불과 10여년 만에 괄목상대하게 됐기 때문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틈만 나면 한국의 교육열,기술,원전을 부러워한다. 제3세계 후진국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사를 배우고 싶어하고 새마을운동을 '근대화의 복음'으로 여긴다. 소비시장에서도 '메이드 인 코리아'는 고품질의 동의어가 돼가고 있다. 맥도날드,피자헛,KFC도 유독 한국에선 힘을 못 쓰고,폴로가 캐주얼 시장에서 토종 브랜드(빈폴)에 밀려 1위를 못하는 나라도 한국 외에는 찾기 어렵다. 세계 1,2위 유통업체 월마트,까르푸도 못 버티고 나가게 만든 게 한국이다.

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해졌다. 한국보다 인구도 많고 1인당 소득이 높은 나라는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6개국뿐이다. 여기에 캐나다를 더한 게 G7이다. 세계는 밴쿠버의 한국 젊은이들에게 놀라는 만큼이나 한국을 '엄친아'로 여긴다.

하지만 나라 안에선 여전히 '못난 아들'로 비쳐진다. 고속성장에 부합하는 숙성기간을 갖지 못해 곳곳에서 골다공증을 앓는다. 정치는 미숙아 수준을 못 벗어났고 부품 · 소재와 과학기술 등 기초체력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 제대로 된 '브랜드 인 코리아'는 손꼽을 만큼 적다. 오바마가 부러워한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도 뒤집어보면 사교육 광풍에 다름아니다. 밴쿠버의 성취 이면엔 무수한 청년백수들의 좌절이 도사리고 있다. 나라 밖의 엄친아가 나라 안에서도 엄친아가 될 수는 없을까.

오형규 생활경제부장 ohk@hankyung.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