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매니저의 투자비밀]이공계 출신 첫 본부장 박상우  "숫자에 모든 해답이 있다"
박상우 우리자산운용 상무(44ㆍ사진)는 이를테면 ‘김성근식 야구’를 하는 펀드매니저다. 프로야구 SK 와이번즈의 김성근 감독은 4번 타자에게 번트를 시키고 에이스 투수도 중간 계투로 마운드에 올린다. 김 감독이 믿는 것은 스타 선수가 아닌, 기록과 통계다.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SK의 모든 선수들은 철저하게 감독이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움직인다. 일명 ‘데이터 야구’다.

박 상무는 기업의 전략이나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 따위는 믿지 않는다. 다른 펀드매니저처럼 기업을 탐방해 CEO의 자질을 평가하거나 향후 실적을 예측하려고도 않는다. 그가 믿는 것은 오로지 숫자다.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계량화된 자료를 활용해 매매 프로그램을 짜는 게 그의 일이다. 요즘 이공계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인 바로 ‘퀀트(Quant)’ 펀드매니저다. 우리자산운용에서 퀀트자산운용본부장을 맡고 있는 퀀트 펀드매니저의 대표주자 박 상무를 한국경제신문의 온라인미디어 <한경닷컴>이 만났다. 그는 이공계 출신 펀드매니저 가운데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현역 펀드매니저이기도 하다.

◆주식의 ‘연금술’, 퀀트란?

퀀트는 ‘양으로 잴 수 있는’ 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퀀티터티브(quantitative)'를 줄인 말이다. 퀀트 펀드는 수학적 모델을 활용, 시장의 움직임을 컴퓨터로 프로그램화하고 이를 근거로 투자판단을 하는 펀드를 말한다.

1980년대 후반 컴퓨터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광범위한 자료와 변수를 단번에 처리할 수 있게 되자 미국 월가를 중심으로 ‘퀀트 펀드’가 무수히 생겼다. 냉전 시대 이후 갈 곳이 없어진 수학, 물리학, 천문학 등을 전공한 이공계 출신 엘리트들이 금융업계에 진출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퀀트 펀드의 대명사로 통하는 미국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의 ‘메달리온펀드’의 경우 1989년부터 2007년까지 연평균 30%가 넘는 놀라운 수익률을 기록했다. 르네상스 테크놀로지를 이끌고 있는 제임스 사이먼스는 2006년 무려 17억달러(당시 환율로 약 1조6000억원)의 연봉을 받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한국도 걸음마 수준이기는 하지만 현재 몇몇 대형 자산운용사를 중심으로 퀀트 펀드가 출시되고 있다.

박 상무는 “퀀트 펀드는 펀드매니저의 직관과 안목이 아닌, 기록과 통계에 의해 운용되기 때문에 수학이나 통계, 물리 등을 전공한 이공계 출신들로 팀을 구성한다”며 “반면 전통적으로 기본적 분석을 잘 하는 경영학이나 경제학 출신들은 설 여지가 별로 없다”고 설명했다.

우리자산운용의 경우 퀀트자산운용본부 내의 펀드매니저 15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8명이 이공계 출신이다. 박 상무도 이공계 출신이다. 그는 서울대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서울대 대학원에서 통계학으로 석ㆍ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통계 전문가, 금융에 입문
[펀드매니저의 투자비밀]이공계 출신 첫 본부장 박상우  "숫자에 모든 해답이 있다"

펀드매니저는 사실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직업이다. 지금이야 이공계 출신의 금융업 진출이 흔한 일이지만, 박 본부장이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한국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펀드매니저가 되는 것은 자장면에 와인을 마시는 것만큼이나 이질적이었다.

첫 직장은 통계분석 서비스를 하는 작은 벤처회사였다. 박사과정 중에 있는 그에게 선배가 도움을 요청한 게 인연이 됐다. 그는 금융기관에 통계분석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했다. 은행이 보유한 주식이나 채권이 시장 악화로 얼마나 손실이 날 수 있을 지 예상치를 계산하는 게 주된 업무였다.

“지금이야 금융사의 위험관리가 보편화 됐지만 당시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어요. IMF 사태로 금융회사들이 위험관리에 눈을 뜨기 시작한거죠. 저는 사실 금융에는 문외한이었지만 통계를 잘 알았고, 은행에 있는 사람들은 금융을 잘 알았지만 통계는 전혀 몰랐습니다. 서로 필요에 의해 통계와 금융이 만난겁니다”

그렇게 금융을 접한 박 본부장은 이후 신용평가사로 자리를 옮겨 비슷한 일을 계속하다가 1999년 동양종금증권 금융공학팀에 입사해 본격적으로 금융인의 길을 걷는다. 이후 KIS채권평가와 ING자산운용(옛 랜드마크자산운용)에서 채권 관련 일을 주로 했다. 지금의 우리자산운용에 온 것은 2007년 10월의 일이다.

◆“모형을 어떻게 짜느냐가 운용의 묘”

퀀트 운용의 묘미는 모형을 만드는 데 있다. 세상에 자료는 넘쳐난다. 이 가운데 의미 있는 숫자를 뽑아내는 게 우선이다. 자료는 중요도에 따라 분류돼 가중치가 주어진다. 모형은 이 숫자들을 조합해서 만들어진다. 모형은 하나일 때도, 여럿일 때도 있으며 모형끼리 합쳐질 때도 있다.

모형을 만들 때는 우선 가정을 설정해야 한다. 예컨대 주식시장의 상승이나 하락에 따른 의사결정 모형을 만든다고 하면 경기선행지수, 주가지수, 금리 등이 변수가 된다. 변수를 정하고 나면 각 변수에 가중치를 둔다. 이 때 여러 변수가 조합되기 때문에 특정 지표만이 활용되지는 않는다. 종목을 선정할 때도 비슷한 절차를 밟는다. 다만 변수가 주가수익비율(PER), 주가순자산비율(PBR), 자기자본이익률(ROE), 배당 등이 될 뿐이다.

이런 다소 복잡한 운영체계 탓에 한국에서 퀀트 펀드는 기관투자자 위주다. 우리자산운용의 퀀트 펀드 대부분도 분석능력이 있는 기관에 팔린다. 일반인에게 판매하려면 일단 은행이나 증권사의 판매직원이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 불완전판매의 위험이 있는 것이다.

우리자산운용은 그래서 일반인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인덱스형 상품부터 내놓고, 이후 점차 영역을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이 회사에서 공모로 판매한 ‘우리프런티어뉴인덱스플러스α증권투자신탁’은 코스피200 지수를 추종하면서 여기에 ‘플러스 알파’를 내는 게 목표다. 이 펀드는 대부분의 운용자산이 인덱스를 추종하고, 10% 내외의 자산만 차익거래(arbitrage) 같은 계량화된 매매기법을 쓴다.

◆“한국의 르네상스 테크놀로지 나와야”

[펀드매니저의 투자비밀]이공계 출신 첫 본부장 박상우  "숫자에 모든 해답이 있다"

“역사적으로 시장을 꾸준히 이긴 사람은 제가 알기로 정말 소수입니다. 잠시 시장수익률을 크게 웃도는 경우는 자주 있고, 이게 몇 년 씩 이어지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꾸준히 크게 시장을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주식시장에 오래 발을 담근 사람일수록 이런 사실을 잘 안다. 박 상무는 그래서 시장을 따라가되 여기서 조금 더 수익을 낼 수 있는 전략을 짜는 게 길게 보면 유리하다고 말한다. 그가 추구하는 운용 스타일도 시장을 크게 이기거나 무조건 수익이 내야 한다는 식이 아니다. 벤치마크로 하는 지수와 같이 가되 여기에 조금 더 수익을 내는 걸 목표로 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낫다고 말한다.

“시장의 변동성이 커질 때는 액티브형 펀드가 지속적으로 수익을 내기 무척 힘듭니다. 부침이 심하다는 얘깁니다. 자산이 많을수록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는 게 중요한데, 한국에서는 액티브형 펀드가 대부분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어요. 인덱스와 퀀트를 조합한 펀드는 장이 빠질 때는 지수보다 덜 하락하고, 장이 오를 때는 지수보다 더 수익이 날 때가 많습니다”

그가 현재 관심을 갖고 있는 상품은 상장지수펀드(ETFㆍExchange Traded Fund)다. 인덱스 펀드를 증시에 상장시킨 것으로, 펀드처럼 가입이나 해지 절차를 밟지 않아도 되고 증권사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을 통해 간편하게 매매도 할 수 있다.

“코스피200에는 종목이 너무 많습니다. 업종 대표 종목 1,2개만 골라서 40~50개 종목으로 ETF를 만들어 봤는데 이게 수익률이 무척 좋습니다. 2004년부터 시장을 연평균 4~5%포인트 이기고 있습니다. 다양한 업종과 종목들로 구성한 ETF를 꾸준히 내놓을 생각입니다”

박 상무는 후배들을 위한 멘토 역할을 하는데도 관심이 많다. 퀀트가 더 보편화되려면 자신 같은 이공계 출신 엘리트가 금융업계에 더 많이 진출해야 한다고 믿고 있어서다. 임원이어서 늘 운용에만 매진하기 힘든 탓도 있다. 언젠가 후배들이 “한국의 르네상스테크놀로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글= 한경닷컴 안재광 기자 ahnjk@
사진=한경닷컴 양지웅 기자 yangd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