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중동 몇 나라를 여행하면서 아랍 문자를 읽을 수 없는 내가 스스로 처량했다. 이집트의 카이로와 룩소에서 시작해 요르단,예멘,오만을 거쳐 두바이에서 여행을 마치면서 매일 만난 것은 아랍 문자의 간판과 거리표지였다. 그걸 하나도 읽을 수 없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얼핏 아랍어 문자는 괴상해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도 모두 표음문자여서 작심하고 배운다면 그리 어려울 것은 아닌 듯하다. 영어와는 반대로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쓰고,글자 모양이 구불구불 시작과 끝이 없어 보이지만,사실은 영어가 26글자로 되었듯이 아랍어는 28개의 문자로 돼 있을 뿐이다. 다만 그 글자가 처음,중간,끝에서,그리고 독립적으로 쓰일 때 다른 모양으로 바뀌기 때문에 사뭇 복잡해 보인다.

그리고 보면 거의 20년 전에 내가 처음 러시아에 갔을 적이 생각난다. 그 얼마 전 태국에 갔다가 도로 표지나 간판을 읽을 수 없어 곤혹스러웠던 기억 때문에,나는 며칠 동안 짬짬이 러시아어 읽기를 공부한 다음 여행길에 올랐다. 러시아어를 표현하는 슬라브 문자는 영어의 로마자와 같은 글자가 여럿이지만,몇 글자는 전혀 다른 발음이다. 슬라브문자를 익히고 몇 단어를 외우며 떠난 러시아 여행이었지만,나의 학습효과는 놀라웠다. 거리의 간판을 읽을 수 있었고,특히 러시아의 묘지에 가서는 각 묘소에 묻힌 주인공이 차이코프스키인지,톨스토이인지 구별할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의 러시아 여행 이후 나는 가끔 생각나면 러시아 글자로 PECTOPAH를 소개한다. 이것이 로마자로는 '펙토파'지만,슬라브문자로는 '레스토란'이 된다. 러시아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당장 그것이 '식당'임을 알 수 있다. 몇 시간만 배우면 습득할 수 있는 러시아어의 학습효과가 얼마나 대단할지 짐작 가는 대목이다.

다시 아랍어로 돌아가자.아랍어는 세계 3억명 이상의 인구,25개국 이상에서 상용되며,유엔의 6개 공용어의 하나다. 원래 3500년 전의 페니키아 문자를 원조로 오늘날의 몇 알파벳 문자는 생겨났다. 그것이 그리스,슬라브,또 로마자로 태어났다. 아랍문자는 이런 분화과정과는 조금 다르다지만,큰 뿌리로 치면 마찬가지인 듯하다.

때마침 지난 19일 교육개발원 발표를 보면 대학의 전공을 가장 활용하지 못하는 학과가 어문학과 등이란다. 불어불문학,언어학,독어독문학,역사 · 고고학,사회학,철학 · 윤리학,유럽 어문학,아시아 어문학,국제학,심리학 등의 순서로 전공활용도가 떨어진다는 발표였다. 대학 전공으로서의 외국어는 이처럼 참담하게 그 활용도가 떨어지고 있다. 외국어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이런 학과들이 많아 그 졸업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더 많은 한국인들이 날로 좁아지는 지구촌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외국어가 그만큼 더 중요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들 여행자 모두에게 그 나라 말을 익히고 떠나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 대신 기초적인 문자 익히기는 꼭 필요하다. 예를 들면 고교나 대학에서 교양필수로 세계 주요문자를 가르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적어도 이렇게 교육받은 한국인들은 러시아에 가거나 아랍세계에 가거나 거리의 표지판이나 간판쯤은 읽을 수 있고,그러는 가운데 그 말 자체를 배우려는 욕구도 일어날 테니 말이다. 물론 주요문자만 시작하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슬라브,아랍 문자,그리고 일본어의 가타카나와 히라가나 각 50자씩 등.중국어야 이미 전국에 한자 배우기가 한창이니 따로 걱정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문자와 언어를 함께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우선 여행자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외국어가 아니라 그 문자다.

박성래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