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동계올림픽] 황영조 닮은 폐활량…막판 '괴력 스퍼트' 원동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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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훈 1만m 올림픽 신기록
스피드 좋아 빨리 치고 나가
중반 힘 아끼고 후반에 질주
스피드 좋아 빨리 치고 나가
중반 힘 아끼고 후반에 질주
이승훈은 쇼트트랙 대표팀에서 탈락한 뒤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한 지 7개월 만에 '빙상의 마라톤'인 1만m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특히 통산 세 번째 완주 만에 정상에 서는 괴력을 선보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우사인 볼트(자메이카)가 2008년 6월 미국 뉴욕 그랑프리대회에서 육상 100m를 시작하고 출전한 네 번째 대회에서 당시 세계기록(9초72)을 작성한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이승훈은 오랫동안 빙속계를 지배해 온 '장거리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꿨다. 이승훈은 체격이 큰 유럽 선수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빙속 장거리에서 타고난 심폐지구력과 이를 활용한 작전,주변의 냉대를 묵묵히 견뎌낸 인내력으로 새 이정표를 세웠다.
지금껏 빙속 장거리는 키 190㎝에 육박하는 유럽 선수들의 독무대였다. 다리가 길어 한 번 빙면을 지칠 때 많이 뻗어나가고,속도가 붙으면 더 잘 지치는 게 이들의 공통점.이승훈은 다리가 짧은 아시아 선수들의 취약점을 타고난 심폐지구력으로 이겨냈다. 그는 "중학교 때 심폐지구력이 마라토너 황영조와 같은 수준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한 번 빙면을 지칠 때 뻗어가는 거리는 유럽 선수에게 뒤지나 이승훈의 스피드가 워낙 좋았기에 이를 상쇄했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이승훈은 7600m 랩타임 때 올림픽기록에 0.52초 뒤지기 시작했고 9600m에서는 0.63초 밀렸으나 마지막 400m를 앞두고 기적적인 스퍼트를 펼쳐 7년 묵은 올림픽기록을 0.37초나 앞당겼다. 지구력과 스피드가 결합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이승훈은 "체격이 큰 선수는 체력소모가 많지만 나는 몸이 작아 체력소모가 많지 않았다"고 선전 비결을 설명했다.
지구력을 염두에 둔 그의 작전도 맞아떨어졌다. 400m를 네 바퀴씩 1600m를 전력으로 달리고 휴식을 취하는 세트 훈련으로 대회를 준비해 온 이승훈은 이날 3000m 이후 질주가 둔해졌으나 후반 동작을 크게 하고 보폭을 넓히는 주법으로 막판 극적 스퍼트를 냈다. 초반 엄청난 스피드로 시간을 단축해 놓았기에 중반 이후 속도가 약간 떨어져도 흔들리지 않았고 체력을 비축한 종반 레이스에서 다시 무서운 스피드를 낸 것이다. 김관규 스피드스케이팅 감독은 "이승훈이 스케이트를 타는 자세는 장거리 선수로 흠잡을데 없이 완벽하다"며 "선수 기량과 자세,작전의 삼위일체로 대업을 이뤘다"고 말했다.
한편 유력한 1만m 금메달 후보였던 스벤 크라머(네덜란드)가 실격당하지 않았더라도 이승훈과 박빙의 승부를 펼쳤을 것으로 분석됐다. 인코스를 두 번 탄 크라머는 이승훈보다 4.05초나 앞선 12분54초50만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인코스가 짧기 때문에 인코스를 한 번 더 도는 선수는 30m 이상 이득을 본다. 김용수 코치는 "인코스를 두 번 돌면 3초 정도 기록이 단축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코스를 제대로 돌았더라도 크라머와 이승훈은 1초차로 금 · 은이 결정됐을 가능성이 높다.
김진수 기자 tr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