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남양군도 강제징용 첫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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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총동원령을 내린 직후인 1939년부터 3년여간 한국인 노무자 5천800여명이 사이판 등 중서 태평양 미크로네시아 일대 섬에 강제 징용됐으며, 이들 대부분이 희생된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2006년 말부터 최근까지 3년여간 조사를 벌여 1939년부터 1941년 사이에만 남양군도에 한인 노무자 최소 5천여명이 강제 동원된 실태를 규명했다고 25일 밝혔다.
남양군도는 1914년부터 1945년 8월 종전 때까지 일본의 위임통치를 받은 미크로네시아 일대 섬들로,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과 일본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위원회 조사 결과 1938년 당시 남양군도에 거주하는 한인은 전체 인구의 1%인 704명에 불과했으나 일제 강제동원으로 수가 급증하기 시작해 1941년에는 전체 인구 증가분의 42%를 기록하며 5천800여명에 달했다.
애초 이곳을 태평양전쟁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던 일본 정부는 한반도에서 노동자를 데려와 대규모 군사시설을 짓는 데 투입했다.
비행장 건설과 사탕수수 재배 등에 혹사당한 이들은 1941년 전쟁이 터지자 총알받이로 몰려 폭격과 굶주림에 시달린 끝에 약 60% 정도가 사망했고, 살아남은 이들도 상당수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숨진 것으로 진상규명위는 파악했다.
뉴스팀 newsinfo@hankyung.com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2006년 말부터 최근까지 3년여간 조사를 벌여 1939년부터 1941년 사이에만 남양군도에 한인 노무자 최소 5천여명이 강제 동원된 실태를 규명했다고 25일 밝혔다.
남양군도는 1914년부터 1945년 8월 종전 때까지 일본의 위임통치를 받은 미크로네시아 일대 섬들로,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과 일본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위원회 조사 결과 1938년 당시 남양군도에 거주하는 한인은 전체 인구의 1%인 704명에 불과했으나 일제 강제동원으로 수가 급증하기 시작해 1941년에는 전체 인구 증가분의 42%를 기록하며 5천800여명에 달했다.
애초 이곳을 태평양전쟁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던 일본 정부는 한반도에서 노동자를 데려와 대규모 군사시설을 짓는 데 투입했다.
비행장 건설과 사탕수수 재배 등에 혹사당한 이들은 1941년 전쟁이 터지자 총알받이로 몰려 폭격과 굶주림에 시달린 끝에 약 60% 정도가 사망했고, 살아남은 이들도 상당수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숨진 것으로 진상규명위는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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