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신뢰를 얻지 못하면 쓰러집니다. 경영진은 주주가치를 염두에 둬 사외이사제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

남대우 SK에너지 사외이사(72)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하다. 웬만한 사무실에선 마이크 소리보다 더 크다. 목소리만 그런 게 아니다. 논리도 정연하다. 힘도 넘쳐난다. 열정도 물씬 묻어난다. 칠순을 넘긴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2008년 9월의 일화 한 토막.SK에너지 경영진은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 뛰어든 포스코의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방안을 이사회 토론에 붙였다. 남 이사는 큰 목소리로 왜 참여하면 안되는지를 역설했다. 다른 사외이사도 거들었다. 이사회 의결안건도 아니었지만,경영진은 이사회 의견을 받아들였다.

'최장수 사외이사','미스터 쓴소리'로 유명한 남 이사가 오는 12일 SK에너지 주주총회에서 물러난다. 소버린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던 2004년 SK그룹 사외이사로 취임한 지 꼭 6년 만이다. 사외이사제가 처음 도입된 1997년부터 치면 13년 만에 사외이사라는 직함을 내놓는다. "기업의 투명경영에 기여할 수 있어 보람있었다"는 남 이사는 "신용이 없으면 쓰러진다(無信不立 · 무신불립)는 걸 기업들이 염두에 뒀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6년 임기를 마치고 SK그룹 사외이사에서 물러나시는데요.


"2004년 3월12일 주주총회에서 이사로 선임됐으니까,정확히 만 6년을 채웠습니다. 최근 4년 동안 SK에너지 주주가치는 5배 이상 커졌습니다. 지난해엔 한국기업구조센터로부터 '지배구조 최우수기관','감사부문 우수부문'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 이사 선임 때 '보다 좋은 지배구조를 통해 투명경영 관행을 확립해 기업가치를 끌어 올리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것 같아 뿌듯합니다. 보람도 있고요. "

▼6년 동안 소신있게 행동했다고 자부하십니까.

"물론이죠.하고 싶은 말은 모두 다 했습니다. 그렇다고 억지부린 건 아니고요(웃음).이사회가 실질적으로 토론하는 분위기여서 아주 좋았습니다. 의장을 맡은 최태원 회장께서도 이사들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스타일이라 이사회가 더욱 활성화된 것 같습니다. "

▼소버린과 SK그룹이 경영권 분쟁을 벌일 때 소버린이 먼저 사외이사로 추천하자 SK그룹도 복수 추천해 화제가 됐었죠.어떤 계기로 소버린으로부터 추천받았는지 궁금합니다.

"2004년 1월 지인을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소버린 측 대리인을 만났더니 SK㈜ 사외이사 후보를 찾고 있는데,참여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러면서 한국에서 외국인 주주의 추천 후보가 되면 상당한 비난과 비방이 따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라고도 했습니다. 고민 끝에 참여하겠다고 말했죠.추천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비방은 개의치 않고,이사가 된 다음 업적으로 평가받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

▼실제 이런 저런 말이 많지 않았습니까.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접수하려는 뜻을 가진 외국자본의 대리인이 아니냐는 시각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당시 소버린이 내세운 것은 '주주권리 강화'와 '투명성을 통한 기업가치 증대','독립된 이사회 확립' 등 3가지였습니다. 기업가치가 올라가면 그 과실을 다른 주주들과 함께 나누겠다고 했습니다.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다고 약속했죠."

▼그렇다면 '소버린 사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결과적으로 우리 상황을 냉정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본시장을 외국인에게 개방해 놓고도 외국인과 내국인의 편을 갈랐던 셈이니까요. 외국자본의 실체를 다시 보는 계기도 됐던 것 같습니다. '기업지배구조란 무엇인가','글로벌 스탠더드란 무엇인가' 등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진 것도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죠."

▼SK는 당시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SK도 사외이사(7명)와 사내이사(3명)의 비율을 바꿔 새로운 이사회를 구성했습니다. 이사들이 마음만 먹으면 경영진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투명경영을 강화했죠.16년 동안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외부 회계감사법인도 공개입찰로 다시 선정했습니다. 깜짝 놀랄 만한 조치였죠.구성원들도 하나로 똘똘 뭉치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그 결과 2004년에는 SK㈜가 창사 이래 처음으로 당기순이익 1조원을 기록했습니다. 외부의 시선도 달라지기 시작했죠.소버린 사태가 없었다면 SK는 분식회계의 멍에를 상당히 오래도록 지고 갔을 겁니다. "

▼외국인 주주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외국인건 내국인이건,소액주주건 따지지 말고 주주로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봅니다. 주주들은 기업가치가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경영자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게끔 기업 경쟁력을 높이고,투명경영으로 주주와 시장의 신뢰를 얻으면 되는 것이죠."

▼SK그룹이 2004년 국내 상장기업 최초로 '사외이사 윤리강령'을 제정했는데요.

"사외이사 윤리강령은 독립된 이사회가 SK㈜의 최고의사결정기구라는 점,이해관계자로부터 초연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SK㈜의 기업가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2005년 11월 한국상장사협의회에서 상장사 표준 윤리강령을 만들 때도 모델이 될 정도로 획기적인 조치였습니다. "

▼해외에서도 관심이 높았다고 들었습니다.

"윤리강령을 발표하고 얼마 뒤 미국 씨티은행,BOA(뱅크오브아메리카)의 여신담당 수석 부행장이 면담을 요청해 만났습니다. 윤리강령을 지키지 못하거나,SK가 또 다시 분식회계와 같은 행동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더군요. 주저없이 'I will resign(사임하겠다)'이라고 답했습니다. 이후 신용평가회사인 S&P가 SK㈜의 신용등급을 올렸습니다. SK는 끊겼던 크레디트 라인(한도대출)을 확보했고요.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은 셈이죠. SK의 기업가치도 이때부터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

▼6년 만에 SK의 사외이사에 물러나시면서 아쉬운 점은 없습니까.

"어렵게 신용을 회복했는데 최근 신용이 다시 하락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무엇보다 아쉬운것은 작년 12월에 LPG(액화석유가스) 담합과 관련해 SK에너지가 리니언시(자진신고자 감면제)를 신청한 일입니다. 이사회 토론을 거치지 않은 사안이었죠.시장에서 신뢰를 떨어뜨리고 동종 회사들끼리 반목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됐습니다. 한번 손상된 신용을 회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한 회사가 왜 그랬을까 싶어 더욱 아쉽습니다. "

▼1997년 사외이사제가 도입되면서부터 사외이사를 해오셨습니다. '사외이사는 거수기'라는 인식도 여전히 많습니다. '옥상옥(屋上屋)'이라는 지적도 있는데요.


"사외이사의 본질은 '협력적 견제'입니다. 독립된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면 기업가치가 커지게 돼 있습니다. 합리적 의사결정이 이뤄지기 때문이죠.물론 이사회 참석이 저조하거나,안건을 미리 검토하지 않고 회의에 참석하는 이사도 있습니다. 자기 견해나 주장을 제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시비를 걸어 회의진행을 방해하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행위도 자제해야 합니다. "

▼소액주주의 의견을 대변할 만한 통로가 마땅치 않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소액주주도 사외이사를 추천해 그 중 일정 비율의 사외이사가 선임되는 길이 마련됐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사회 토의도 더욱 다양한 입장에서 활발하게 전개될 겁니다. "

▼오너 중심의 한국 기업 특수상황에서 바람직한 지배구조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너가 회사의 건전한 발전을 바란다면 투명경영으로 시장의 신뢰를 얻어 기업가치를 올려야 합니다. 특히 다양한 경륜을 지닌 사외이사들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적절하게 견제할 수 있도록 글로벌 스탠더드에 걸맞는 지배구조를 갖추는 일도 중요합니다. 거수기 역할을 하는 사외이사제를 운영하는 기업과 개방적인 사외이사가 있는 기업의 경영성과는 판이하게 나타날 것으로 확신합니다. "

하영춘/이정선 기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