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여대생 기린은 자신을 속물이라고 한다. 죽자사자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A급 짝퉁' 가방과 지갑을 사고,수입 생수병에 학교 정수기 물을 채워 들고 다닌다. 사회복지학 전공이지만 불우한 이웃에 대한 연민이나 죄책감도 없다. 연애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신경하고 못생긴 남자와 연애를 이어가는 건 '미래에 의사 사모님이 될 일말의 가능성' 때문이다.

소설가 오현종씨(37)의 장편소설 《거룩한 속물들》(뿔 펴냄)의 주인공 기린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철도 없고 허영심만 가득한 젊은이 같다. 그런데 겉으론 "너무 돈이 없어서 비루한 속물"이라고 자신을 합리화하지만,속으론 이런저런 고민과 꿈을 안고 있는 기린을 지켜보다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상보다 현실적인 조건이 중요할 수 있다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가는 20대가 겪을 법한 시행착오에 가까웠다. "역시 가장 끔찍한 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순진하게 살다가 뒤통수 맞는 인생이다. 아아,무섭다. 나는 보다 철저한 속물이 되어야겠다"는 기린의 다짐만 봐도 그렇다.

기린은 그래도 '순진한 속물'이기라도 하지,소설에서 펼쳐지는 '진짜배기 속물'들의 천태만상은 더 당황스럽다. 이 틈바구니에서 기린은 용케 제자리를 찾아간다. '나 같은 속물에게 문학은 어울리지 않는다.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했던 기린은 졸업 후 당분간 백수 신세일지라도 꿈을 따라가기로 결심한다.

'수건돌리기의 수건처럼,자신의 등 뒤에는 놓이지 않길 바라는 무엇.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등 뒤에 놓여,나만은 술래가 안 되었다는 안도의 숨을 쉬게 해줄 무엇.그것이 바로 가난'이라는 식의 통찰이 톡톡 튄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