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 · 1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죄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만해 한용운 선생은 변호사를 대지 말고,사식을 들이지 말며,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을 주변에 당부했다고 한다. 그가 수감 중 지은 시 '설야(雪夜)'는 꿈마저 재가 될 정도로 혹독한 감옥에서 한 밤 종소리를 들으며 느낀 비감한 심사와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사방 산이 감옥을 둘러싸고 눈은 바다 같은데/쇠처럼 차가운 이불속에서 꿈은 재가 되었네/철창도 가둬두지 못하는 것 있으니/한 밤 종소리는 어디서 오는 건가. '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근 · 현대사의 수난과 저항을 상징하는 곳이다. 을사늑약을 전후해 형정권(刑政權)까지 강탈한 일제는 감방이 턱없이 부족한 것을 보고 1907년 신식 감옥을 짓기 시작했다. 1908년 10월 준공한 이래 옥사를 계속 증축해 1930년대 중반엔 수감인원이 수천명으로 늘어날 만큼 커졌다. '경성감옥' '서대문형무소''서울형무소''서울교도소''서울구치소' 등으로 이름도 여러차례 바꿔달았다.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갈 때까지 80년 동안 약 35만여명이 거쳐갔지만 3 · 1운동 주역을 비롯한 애국지사와 항일투사를 가둔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한용운 손병희 선생 등 민족대표 상당수가 이곳에서 극심한 고초를 겪었고,유관순 열사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모진 고문 끝에 17세의 나이에 순국한 곳도 서대문형무소다. 또 해방 이후 좌우익투쟁,민주화운동 등 굴곡진 역사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10 · 26사태를 주모한 김재규,위장 귀순간첩 이수근 등도 이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1988년 사적 제324호로 지정된 후 역사관 등을 갖춰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 서대문형무소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작업이 이달부터 시작된다. 최근 발견된 1930년대 도면을 토대로 개소 초기의 취사장 및 보안과 건물,격리 운동장인 격벽장,유관순 옥사 등을 순차적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전시실에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각종 사료와 함께 교도관 복장과 수의,형벌기구 등이 전시되고 수형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영상 체험관도 들어선다.

역사 현장을 복원하는 것은 그곳에 담긴 '정신'을 되살려내는 일이기도 하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나라를 지켜낸 현장을 보면서 마음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대문형무소를 민족혼이 흐르는 역사교육의 명소로 손색이 없도록 복원해야 하는 이유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