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폐막한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스포츠 실력을 넘어 세계 경제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특히 한 · 중 · 일 3국의 경우'뜨는 한국,무서운 중국,정체된 일본'의 현실을 옮겨 놓은 듯했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총 14개의 메달(금메달 6개)을 따내며 역대 최고 성적인 종합 5위를 기록했다. 중국은 쇼트트랙에 집중, 11개의 메달(금메달 5개)로 종합 7위에 오르며 한국을 바짝 뒤쫓았다. 반면 동계올림픽을 두 차례나 개최하며 '아시아 맹주'를 자처하던 일본은 '노 골드(no gold)'에 그쳤다.


밴쿠버 올림픽 성적표는 각국의 경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한국은 유사 이래 최대의 국운 상승기를 맞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질서 재편의 중심축인 G20(주요 20국) 정상회의를 아시아와 신흥국을 통틀어 처음 유치했고, 지난해 무역흑자는 404억달러로 사상 처음 일본을 제쳤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작년 말에는 프랑스 일본 등 쟁쟁한 원전 선진국을 제치고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에 성공했다.

김연아의 세계 제패는 한국경제의 도약을 연상케 한다는 게 파이낸셜타임스의 분석이다. 실제 한국이 1960년대 경제 개발에 나섰을 때 지금처럼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한 나라가 드물었듯,처음 피겨화를 신은 7살(1996년) 김연아에게서 미래 피겨 여왕의 모습을 떠올린 사람은 몇이나 될까.

스피드 스케이팅 500m와 1000m에서 '깜짝 메달(금,은)'을 따낸 모태범과 원전 시장의 다크호스 한국을 비유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한국은 경제발전 초기 저가 제품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뒤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경쟁우위를 확대했다.

동계올림픽도 마찬가지다. 과거 쇼트트랙을 빼곤 거의 메달을 못 땄던 한국이 이번엔 스피드 스케이팅과 피겨에서 잇따라 메달을 캐내며 겨울 스포츠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했다.

중국은 연평균 10% 안팎의 고속성장을 거듭하며 세계 시장의 '슈퍼 파워'로 급부상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은 한국의 제조업 경쟁력에 위협이 되고 있다. 여자 쇼트트랙에서 중국이 4개의 금메달을 휩쓸며 한국을 밀어낸 데 이어 피겨 페어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낸 것은 과거 한국의 '선택과 집중,이후 경쟁우위 확대 전략'을 보는 듯하다.

이에 반해 일본은 '도요타 사태'와 'JAL(일본항공) 파산'이 상징하듯 경제 강국의 위상에 금이 갔다. 장기 불황과 디플레이션(전반적인 물가 하락),고령화,국가 부채 확대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한.중.일 3국의 경제 현실과 동계올림픽 성적의 상관관계를 역동성에서 찾았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한국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경제의 역동성을 키웠고 중국도 신흥국가로서 경제 개발과 국력 신장에 대한 국민적 의지가 넘치는 반면 일본은 그렇지 못하다"며 "일본이 아시아 최고 부자국가이지만 사회 분위기가 침체돼 있고 이런 분위기가 동계올림픽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말했다.

큰 틀에서 보면 이번 동계올림픽은 아시아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일본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중국이 선전한 덕이다. 한.중.일 3국은 이번 대회에서 총 258개의 메달 중 30개를 따냈다. 역대 최대 규모다. 전체 메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1.6%로 2002년 미국 솔트레이크시티(6.0%),2006년 이탈리아 토리노(9.1%) 때보다 훨씬 높다.

한.중.일 3국이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98년 13.1%에서 2008년 16.8%로 상승했다. 아직 미국(23.4%)과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22.5%)에 못 미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은 2014년 한.중.일의 경제 비중이 20.4%로 유로존(18.5%)을 제치고 미국(23.3%)을 위협할 것으로 내다봤다. 아시아로 '부의 이동'이 현실화한다는 것이다.

반면 겨울 스포츠 강국 러시아는 몰락했다.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대회 때 1위,1998년,2002년,2006년 대회에서 3~5위를 차지했던 러시아는 이번에 10위권 밖(11위)으로 밀렸다. 지금까지 24개의 금메달을 휩쓴 피겨 종목에서 이번에는 금메달 사냥에 실패했다. 소련 붕괴,금융위기 이후 에너지 가격 폭락으로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베테랑 코치들이 러시아를 떠났고 선수들에 대한 금전적 보상도 취약해진 결과다.

올림픽 아이스댄스에서 두 차례 금메달을 딴 러시아 스타 예브게니 플라토프는 "우리는 시스템을 잃었고 돈을 끌어오기 위한 싸움도 해야 한다"고 탄식했다.

러시아의 빈 자리를 메운 것은 아시아와 북미지역.미국은 이번 대회에서 캐나다 독일에 이어 종합 3위를 기록했지만 총 메달 수(37개)로는 1위를 차지했다. 금융위기에도 여전히 세계 최고 경제대국의 위상을 지키고 있는 것을 연상시킨다. 캐나다는 아이스댄스 1위에 올랐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경제와 스포츠는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며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스포츠 저변이 넓어지고 좋은 선수가 나올 확률이 높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한국이 세계 경제 전쟁에서 진정한 승자가 되려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있다고 지적한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유 본부장은 "한국이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에 비해 부족한 기술력과 시스템,노사 안정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이 스피드 스케이팅이나 피겨 등 빙상(氷上) 종목에서만이 아니라 알파인 스키 등 설상(雪上) 종목에서도 메달을 따내야 진정한 동계스포츠 강국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덧붙였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