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CEO들의 퇴장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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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양복 안쪽에는 늘 빛바랜 메모가 들어있었다. 종이가 닳아 너절해지면 어김없이 코팅을 해놓았다. 몇 개의 숫자와 일정,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빼곡하게 들어찬 메모는 뒤늦게 볼펜으로 추가해 놓은 글귀들로 범벅이 됐다. 매끈한 코팅지 속에 변색된 메모는 차라리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주술사의 부적 같은 것이기도 했다.
2009년 초 그가 들고 다닌 메모는 '위기가 왔다. 기회가 왔다'였다. 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 파산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앞날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이냐에 대한 고민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것이었다. 해가 바뀌어 올해부터 그가 넣고 다닌 메모는 자산매각과 부채비율 등 회사의 재무구조 개선에 대한 일정으로 바뀌었다. 늘 입술이 부르트고 피로에 절어도 "2010년 말이 되면 부채비율이 두 자리 숫자로 내려갈 테니 두고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그랬던 그가 오늘 퇴임을 발표한다고 한다. 올해로 직장생활 37년째.알 만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맡아 7년여를 봉직하면서 한결같이 앞만 보고 내달려온 길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이제 못 다 이룬 꿈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라고 시작되는 눈물 어린 퇴임의 변은 지난 주말,사전에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와 저녁식사를 했던 기자에게 남다른 감회를 안겨다주었다.
그러고 보니 3월은 많은 기업들의 주주총회 일정이 몰려있는 달이다. 기업 조직에 청춘과 열정을 바쳤던 많은 이들이 표표히 자리를 내놓고,보다 젊고 촉망받는 사람들이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 공간이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세월의 흐름으로 보면 자연스런 세대교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 모두는 떠나가는 기업인들에 대한 헌사(獻辭)에 인색했던 것이 사실이다. 현역에서 물러나는 당사자들 또한 혹여 자신들을 대신하게 될 후배 경영진들에 대한 스포트라이트에 누(累)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극구 대외 접촉을 사양해왔다. 한때 스타 CEO로 각광받았던 많은 이들도 그렇게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잊혀져가고 있다.
퇴장하는 기업인들에 대한 사후 예우(?)는 젊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의 현역 은퇴에 바치는 헌사들과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일부 선수들의 올림픽 무대 좌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쏟아내며 아쉬움을 표시하지만,피말리는 경제 전쟁터를 누벼온 기업 전사들의 은퇴에는 둔감하기 짝이 없는 게 현실이다.
한국이 낳은 피겨 스케이팅의 영웅 김연아 선수는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2014년 소치 올림픽 참가 여부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부담을 내려놓고 기분좋은 피로감에 젖은 선수의 소감을 야박하게 평할 수는 없겠지만,똑같은 뉘앙스의 질문을 당대의 CEO들에게 물어보면 완전히 다른 답변이 나올 게 분명하다.
그들에겐 시간을 두고 찬찬히 생각해볼 앞날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의 최정점에서,조직의 최상위 단위로서 당대에 달성하고 체화시켜야 할 경영전략과 전술이 깨알 같은 메모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새삼 그들의 퇴장이 아쉽다.
"CEO 여러분,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진심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
조일훈 산업부 차장 jih@hankyung.com
2009년 초 그가 들고 다닌 메모는 '위기가 왔다. 기회가 왔다'였다. 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 파산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앞날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이냐에 대한 고민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것이었다. 해가 바뀌어 올해부터 그가 넣고 다닌 메모는 자산매각과 부채비율 등 회사의 재무구조 개선에 대한 일정으로 바뀌었다. 늘 입술이 부르트고 피로에 절어도 "2010년 말이 되면 부채비율이 두 자리 숫자로 내려갈 테니 두고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그랬던 그가 오늘 퇴임을 발표한다고 한다. 올해로 직장생활 37년째.알 만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맡아 7년여를 봉직하면서 한결같이 앞만 보고 내달려온 길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이제 못 다 이룬 꿈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라고 시작되는 눈물 어린 퇴임의 변은 지난 주말,사전에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와 저녁식사를 했던 기자에게 남다른 감회를 안겨다주었다.
그러고 보니 3월은 많은 기업들의 주주총회 일정이 몰려있는 달이다. 기업 조직에 청춘과 열정을 바쳤던 많은 이들이 표표히 자리를 내놓고,보다 젊고 촉망받는 사람들이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 공간이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세월의 흐름으로 보면 자연스런 세대교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 모두는 떠나가는 기업인들에 대한 헌사(獻辭)에 인색했던 것이 사실이다. 현역에서 물러나는 당사자들 또한 혹여 자신들을 대신하게 될 후배 경영진들에 대한 스포트라이트에 누(累)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극구 대외 접촉을 사양해왔다. 한때 스타 CEO로 각광받았던 많은 이들도 그렇게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잊혀져가고 있다.
퇴장하는 기업인들에 대한 사후 예우(?)는 젊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의 현역 은퇴에 바치는 헌사들과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일부 선수들의 올림픽 무대 좌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쏟아내며 아쉬움을 표시하지만,피말리는 경제 전쟁터를 누벼온 기업 전사들의 은퇴에는 둔감하기 짝이 없는 게 현실이다.
한국이 낳은 피겨 스케이팅의 영웅 김연아 선수는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2014년 소치 올림픽 참가 여부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부담을 내려놓고 기분좋은 피로감에 젖은 선수의 소감을 야박하게 평할 수는 없겠지만,똑같은 뉘앙스의 질문을 당대의 CEO들에게 물어보면 완전히 다른 답변이 나올 게 분명하다.
그들에겐 시간을 두고 찬찬히 생각해볼 앞날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의 최정점에서,조직의 최상위 단위로서 당대에 달성하고 체화시켜야 할 경영전략과 전술이 깨알 같은 메모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새삼 그들의 퇴장이 아쉽다.
"CEO 여러분,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진심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
조일훈 산업부 차장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