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발전 단계에서 피치 못할 것 같긴 하다. 그래도 너무하다.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진다. 워낙 의견들이 갈라져 우리 사회의 경우는 헤겔의 변증법도 정반합(正反合)이 아니라 양반합(兩反合)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처음 출발이 정(正)이 아니라 갈라진 둘(兩)이란 뜻이다.

세종시를 둘러싼 갈등은 말을 꺼내기도 두려울 정도로 우리 사회를 갈라놨다. 갈등을 최소화하며 절묘한 해법을 찾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이런 때는 먼 나라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례를 전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아담 카헤인이라는 사람이 쓴 '통합의 리더십'에는 인종차별 문제로 우리보다 훨씬 골이 깊은 갈등을 겪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얘기가 나온다. 그들이 사회적 갈등을 해결한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다.

1991년의 남아공은 전환기였다. 흑인들은 수십년의 투쟁 끝에 백인정부로부터 인종분리정책 포기 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불신의 골은 여전했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파벌 간의 파워 게임이 갈등을 증폭시키기만 했다.

남아공 리더들은 정쟁 대신 새로운 방식으로 돌파구를 마련키로 했다. 흑백 양측을 포함한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시나리오 워크숍'을 갖기로 한 것이다. 22명의 대표가 몽플레 컨벤션센터에 모였다. 이들은 2년여에 걸쳐 네 차례 모임을 갖고 마침내 1993년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네 가지 시나리오를 도출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타조'였다. 백인 정부가 차기 정권을 잡아 타조처럼 머리를 모래 속에 처박고 다수의 흑인들이 요구하는 협상안에 응하지 않는 경우를 상정했다. 두 번째는 '레임덕(Lame Duck)'.약체 정부가 들어서 개혁이 미뤄지는 경우를 그리고 있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이카루스(Icarus)'였다. 흑인 정부가 대중의 지지를 받아 집권하지만 너무 이상적인 국가사업을 추진하다 재정적인 문제에 부딪쳐 좌절하는 경우다. 네 번째는 '홍학의 비상'이었다. 모든 세력들이 연합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천천히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자,몽플레 워크숍 참여자들은 이 시나리오를 갖고 국민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시나리오 요약본을 25페이지로 만들어 언론에 배포하고 100차례 이상의 시나리오 토론회를 개최했다. 최악의 암울한 미래에서부터 찬란한 영광의 미래까지 다룬 네 가지 시나리오가 앞에 놓였다고 했을 때 과연 국민과 사회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결국 방향은 최선의 시나리오 달성을 위해 모두가 노력하는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면 드 클레이크 대통령이 이끄는 백인 정부는 흑인들의 요구를 외면하는 타조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만델라가 이끄는 흑인 정당은 무리한 국책 사업으로 경제가 파탄 나는 일을 막기 위해 힘썼다. 그 결과 남아공 사람들은 느리지만 서로 협동하면서 흑백이 연대하는 나라를 건설할 수 있었다. 네 번째 시나리오대로 수만마리의 홍학이 함께 나는 장관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클레이크와 만델라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도 바로 이 해였다.

서로 다른 집단이 모여 시나리오를 만들어내는 몽플레 프로젝트는 그러나 뜻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이뤄져야 하고 참여자들이 방법론을 공유해야 한다. 몽플레 프로젝트도 학습조직론과 시나리오기법이 기본 방법론으로 활용됐다.

'최악을 피하고 최선을 택하자'는 데만 공감할 수 있다면 한국판 몽플레 프로젝트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존과 인권이 걸렸던 남아공 문제에 비할 때 세종시의 경우는 훨씬 작고 쉬운 것 아닐까. 세종시 문제가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우리 앞에 놓인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논의하는 장이 지금이라도 마련됐으면 한다. 갈등을 해결하는 성공 사례도 이 기회에 쌓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권영설 한경 아카데미원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