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A사장이 잠을 깬 때는 2008년 3월 어느날 새벽녘이었다.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사장님,큰일 났습니다. 사무실이 털렸습니다. "

한달음에 자신이 운영하는 서울 한남동 주유소에 도착한 A사장은 곧장 도둑을 맞은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곳은 난장판이었다. 서랍이란 서랍은 죄다 열려 있었고,바닥엔 온갖 비품이 흩어져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한 구석에 놓아둔 금고로 다가간 그의 얼굴엔 실망감과 안도감이 교차됐다. 2개의 금고 중 하나는 보기좋게 털린 반면 다른 하나는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도둑이 각종 도구로 문을 열려고 시도한 탓에 문틈과 모서리가 훼손됐을 뿐이었다.

'도선생'을 두 손 들게 만든 '강력 금고'는 신진금고 제품이었다. 두툼한 강철과 정밀한 잠금장치로 무장한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운 좋게도 A사장은 귀중품과 중요 문서 대부분을 이 금고에 보관해온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이재원 대표(62)는 "대다수 고객들은 도난사고를 당해도 외부에 알리기 싫어하지만 A사장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직접 회사에 전화를 걸어 '튼튼한 금고를 만들어준 덕분에 큰 손해를 면했다'며 연신 고마워했다"고 말했다.

금고업계에서 신진금고는 탄탄하고 실력있는 기업으로 통한다. 가정용 금고보다 훨씬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은행용 금고 시장의 최강자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은행용 대여금고의 경우 시장 점유율이 60%에 달한다. 국민 신한 하나 SC제일 기업은행 등이 신진금고의 고객이다. 물론 가정용 및 사무실용 금고 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신진금고의 역사는 창업주인 고(故) 이준용 회장(1924년생)의 '가출'에서 시작됐다. 충남 당진의 농가에서 태어난 그가 "더 큰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때는 1942년.영등포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금고 공장에 취직한 이 회장은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금고 제작기술을 하나씩 배워나갔다. 대한민국의 '1세대 금고 기능공'이었던 셈이다.

이 회장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금고업체 근무 경험이 있는 동료 2명과 함께 신성금고를 공동 창업하고 대표를 맡았다. 간판은 금고 제작소였지만,1950년대까지만 해도 금고 수요가 별로 없었던 탓에 신성금고는 상당 기간 철제 캐비닛을 만들어 운영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차츰 달라졌다. 산업화 바람과 함께 속속 설립된 은행지점과 기업,그리고 부를 축적한 개인을 중심으로 금고 수요가 늘어난 덕택이었다. '한지붕 세사장'이었던 신성금고의 동업은 거기까지였다. 3명의 공동 창업자는 1969년 "선의의 경쟁을 통해 시장을 더 키워보자"며 24년간 함께한 동업 관계를 청산한다.

이 회장은 서울 응봉동에 약 1000㎡ 크기의 부지를 마련,신진금고를 설립했다. '베테랑 금고 기능공'이 세운 신진금고는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맞물려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잠시.1973년 불어닥친 1차 오일쇼크는 신진금고를 벼랑 끝으로 몰고갔다. 오일쇼크 직전 농협의 전국 단위조합에 수백개의 금고를 공급하기로 계약한 것이 화근이 됐다.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탓에 기존 계약대로 금고를 만들면 엄청난 적자를 피할 수 없었다. 직원들은 "농협에 사정을 얘기하고 계약단가를 올려야 한다. 안 그러면 회사가 망한다"고 주장했지만,이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계약은 기업끼리 맺은 약속이다. 신뢰를 잃으면 모든 걸 잃게된다"며 계약 단가대로 금고를 제작해 납품했다.

손해를 보면서 약속을 지킨 대가는 컸다. 이 회장은 살던 집을 팔고 공장에 있는 쪽방으로 가족 모두를 데려와야 했다. 이즈음 성균관대 상학과를 졸업하고 신진금고에 입사한 장남 이 대표의 업무는 매일 명동 사채시장으로 출근해 어음을 할인받는 것이었다. 이 대표는 "이자가 월 3~4%에 달하는 사채를 쓰다보니 벌어들인 돈은 그대로 사채업자 손에 들어갔다"고 회고했다.

물론 신뢰를 지킨 것에 대한 보상은 장기적으로 되돌아왔다. 농협은 추가로 금고를 발주할 때 신진금고를 가장 먼저 찾았고,'신진금고는 믿을 만하다'는 소문에 다른 은행들도 하나둘씩 고객이 됐다. 일반 가정과 사무실의 수요도 꾸준히 늘었다. 수입이 늘면서 빚은 점차 줄기 시작했고 1980년대 초 지긋지긋했던 빚더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 때부터 시작한 '무차입 경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대표가 사실상 회사 경영을 책임지기 시작한 1983년 이후 신진금고는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뻗어나갔다. 여기에는 고교와 대학 시절 아마추어 야구선수였던 이 대표의 '야구 경영'이 큰 힘이 됐다. 그는 야구의 '팀 플레이'를 회사에 적용했다. 개인보다는 팀을 중시하는 문화가 정착되면서 조직은 한층 단단해졌고,고객들은 언제나 깍듯하고 예의바른 신진금고맨들에게 호감을 보였다.

선수 시절 몸에 밴 이 대표의 뚝심과 담력은 1980년대 후반 외국 제품 일색이었던 대여금고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 1000~2000개의 개인 금고를 사물함처럼 한데 묶은 대여금고는 어느 한 곳에 1㎜의 오차만 생겨도 전체적인 균형이 틀어지기 때문에 당시 국내 기술로는 넘보기 힘든 '벽'이었다. 실패의 위험성이 큰 신사업에 도전한 뒤 회사 기술자들은 일본 제품을 해체한 뒤 재조립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국산화하는 데 성공,시장을 정복해 나갔다.

위기는 2008년 말 찾아왔다. 미국의 은행들이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자 국내 은행들도 신규 점포 개설을 꺼리면서 130억원을 넘나들던 매출이 반토막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직구'가 통하지 않자 이 대표는 '변화구'를 꺼내들었다. 해외에서 길을 찾기로 한 것이다. 러시아 몽골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금고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본격적인 수출에 나선 것.이 대표의 전략은 적중해 이르면 연내 수출 비중이 내수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갈 전망이다. 연세대와 영국 메트로폴리탄대학을 거쳐 2007년 말 신진금고에 합류한 장남 이동희 과장(32)은 아버지와 호흡을 맞추며 수출 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이 대표는 "올해 해외시장에서만 6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특수문 설계업체인 삼훈(대표 모종삼)과의 제휴를 통해 원자력발전소와 군용 벙커 등에 들어가는 특수문 제작에도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