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가 1600선 안팎에서 지지부진한 흐름을 이어가면서 투자자들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유가증권시장 하루 거래금액도 4조원에 미치지 못하는 날이 허다할 정도로 눈치보기 장세가 뚜렷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 주식형 펀드에서는 돈이 빠지고 있다. 지난해 7조7280억원이 순유출된 데 이어 올 들어 이달 2일까지 2520억원이 빠져 나갔다. 그렇다고 증시가 큰 폭으로 곤두박질칠 가능성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도 아니다. 이처럼 어정쩡한 장세에서 랩어카운트가 대안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주식형 펀드에 비해 자유로운 투자전략을 구사하며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펀드랩은 환매수수료 없어

실제로 거액 자산가를 중심으로 랩어카운트 투자가 활기를 보이면서 시장 규모가 1년 새 두 배로 성장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일임형 랩어카운트 계약자산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19조9702억원으로 2008년 말 11조8446억원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커졌다. 고객 수도 46만8000여명에서 48만3000여명으로 불어났다.

랩어카운트는 '포장하다'라는 뜻의 랩(Wrap)과 '계좌'를 의미하는 어카운트(Account)를 합친 말이다. 증권사가 고객 계좌에 들어 있는 돈을 주식 채권 펀드 파생상품 등 다양한 자산에 투자한다. 주식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주식랩'과 여러 펀드에 분산 투자하는 '펀드랩'이 가장 흔한 형태다.

주식형 펀드가 대개 100개 안팎의 종목을 편입하는 데 비해 주식랩은 10~20개 종목으로 포트폴리오를 짜서 시장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한다. 주식 편입 비중에 제한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증시가 약세로 예상되면 주식을 모두 팔아 비중을 제로(0)로 만들 수도 있다. 주가가 빠지면 사실상 대응할 방법이 없는 주식형 펀드와 차이가 난다.

물론 상대적으로 소수 종목에 집중 투자하는 만큼 상황에 따라서는 주식형 펀드에 비해 오히려 더 큰 손실을 볼 수 있다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펀드랩은 환매수수료가 없다. 그만큼 자유롭게 가입하고 해지할 수 있다. 안성재 삼성증권 포트폴리오운용팀 차장은 "국내외 시장 동향을 파악해 수천개에 달하는 펀드 가운데 적당한 투자 대상을 골라내 매번 갈아타기를 하는 게 개인투자자에겐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라며 "펀드랩 자문수수료가 낮게 책정돼 있어 직접 펀드에 가입하는 것보다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랩어카운트는 공모 펀드와 달리 개인별로 계좌를 따로 만들어 관리해준다. 홈트레이딩 시스템(HTS)으로 자신의 돈이 어디에 투자되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투자자문사 자문받는 주식랩 인기

시장 규모가 커지자 증권사들도 다양한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투자자문사들의 자문을 받아 운용하는 주식랩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삼성증권은 케이원 브레인 등 유명 투자자문사들과 계약을 맺고 외부 자문형 주식랩 8개 상품을 내놓았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주식형 펀드를 운용하는 투신사들은 코스피지수보다 좋은 수익률을 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지만,투자자문사들은 성공보수를 받기 위해 시장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높은 수익률을 추구하기 때문에 주식랩을 선호하는 투자자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에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해외에서는 외부 자문형 주식랩이 보편화돼 있어 랩어카운트 상품을 모두 외부 자문형으로 운용하는 회사도 많다"고 덧붙였다.

우리투자 · 미래에셋 · 현대 · 대우 · 하나대투증권 등도 앞다퉈 외부 자문형 주식랩을 출시했다. 최일호 하나대투증권 랩운용부 차장은 "증시가 좀 오른다 싶으면 펀드 고객들이 돈을 빼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 자금을 외부 자문형 주식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증권업계에서는 전체 주식랩의 15~20%가 외부 자문형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랩어카운트는 원래 최소 가입 금액이 1억원 선으로 부자만을 위한 자산관리 서비스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증권사들이 최소 가입 금액을 1000만원 이하로 낮추고 매월 수십만원씩을 넣는 적립식 상품도 선보이면서 대중화하는 양상이다.

대우증권이 지난 1월 내놓은 예금매칭형 랩은 최소 가입 금액이 1000만원이다. 증권회사의 정기예금에 해당하는 이 상품은 3개월 6개월 1년 등 기간별로 확정금리를 보장한다. 금리는 은행 특판예금 상품과 비슷한 수준이다. 현재까지 100억원의 자금이 이 상품에 몰렸다. 동양종금증권은 매월 10만원씩 넣는 적립식 상품인 월드드림 펀드랩을 내놨고,현대증권은 월 적립금이 30만원인 W세이브 펀드랩을 출시했다.

◆다양한 상품 새로 선보일 전망

랩어카운트 상품은 더욱 다양해질 전망이다. 삼성증권은 이달 4일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맨인베스트먼트와 상호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이 회사의 자문을 받는 랩어카운트 상품을 출시하기로 했다. 맨인베스트먼트는 약 50조원의 운용자산을 보유한 대안투자 분야의 세계적 회사여서 주목할 만한 상품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삼성증권은 IT(정보기술) 바이오 조선 건설 등 업종별 투자에 주력하는 랩도 선보일 예정이다.

미래에셋증권은 중간 수준의 위험을 선호하는 고객을 위한 중립형 상품,장기 적립식 전용 상품,해외 주식투자 대행 상품 등을 준비하고 있다. 동양종금증권은 ETF(상장지수펀드)에 투자하는 상품을 더욱 세분화시켜 채권ETF 혼합형 상품,레버리지 ETF와 인버스 ETF를 활용한 상품 등을 개발하고 있다.

증권업계 전문가들은 "인구고령화와 베이비붐 세대의 풍요로운 노후생활 욕구 등으로 안정적인 종합자산관리 서비스로서 랩어카운트가 지속적으로 인기를 모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장경영 기자 long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