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180여개국에서 1억여명이 시청하는 미국 프로풋볼(NFL) 챔피언 결정전(슈퍼볼).세계적인 광고대행사들이 자존심을 걸고 경쟁하는 경연장으로,올해는 50여개 글로벌 기업들이 광고를 선보였다. 현대자동차는 지난달 CBS의 '슈퍼볼' 중계방송에 30초짜리 광고 8편을 내보냈다. 광고비로 지불한 금액은 1000만달러 이상.하지만 '슈퍼볼' 광고로 얻게 될 브랜드 이미지 제고 등 무형의 수익은 그보다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기업들이 해외 유수의 신문이나 방송 등에 광고를 내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통상 '미디어 플래너'를 거쳐야 한다. 미디어 플래너는 광고대행사에 소속돼 매체계획을 세워주는 사람이다. 시청률이나 발행 부수,열독률,소비자 조사 자료 등을 근거로 매체를 선정하고 광고계획을 세운다.

광고대행사 이노션월드와이드의 이재강 차장(35)은 '해외 미디어 플래너'다. 그는 '슈퍼볼' 광고처럼 해외 매체에 국내 기업의 광고를 집행한다. 전 세계 수십개국의 수많은 매체를 관리하며 매체 비용으로 3억달러를 주무르는 '큰손'인 이 차장을 지난 4일 오후 서울 역삼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해외 미디어 플래너라는 직업이 생소한데요.

"아직 국내에 있는 해외 미디어 플래너의 숫자가 적어서 그럴 겁니다. 이노션과 제일기획,HS애드 정도에만 있거든요. 이노션은 해외에 진출한 현대차그룹을,제일기획은 삼성을,HS애드는 LG 등의 해외 매체 광고업무를 맡고 있어요. 최근에는 다른 기업들과 정부,공기업 등도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면서 저희를 찾고 있죠."

▼그럼 주로 현대차를 담당하겠네요.

"그렇죠.저는 EU 동유럽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 태평양 중남미 등 세계 6개 지역 60여개국의 수많은 매체에 현대차 광고를 내보내고 관리합니다. 미주 지역과 호주 인도 중국에는 이노션의 해외 법인이 직접 관할하고요. "

▼얼마나 많은 매체를 관리합니까.

"사실 저도 정확한 숫자를 잘 몰라요. 방송과 신문뿐만 아니라 잡지,옥외광고 등 다양한 매체가 있거든요. 이를테면 한 국가에 방송사 5개,신문 10개,잡지 30개 정도 있다고 치고 여기에 옥외 · 인쇄광고까지 더한다면….옥외광고는 너무 많아서 헤아리기도 어려워요. 프랑스의 경우 현대 · 기아차의 옥외광고가 1만개를 넘습니다. 그래서 원활한 관리를 위해 중간에 별도의 대행사를 씁니다. "

▼업무 강도가 높습니까.

"외국과의 시차 때문에 야근이 많습니다. 오전엔 주로 이메일을 처리하고 오후가 되면 각 나라들과 화상회의나 전화 업무를 시작합니다. 오후 2시쯤이면 중동 지역 국가의 출근시간이 되고,5시께는 유럽,9시가 넘으면 남미쪽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업무를 보거든요. 제가 회사에서 국제전화를 가장 많이 쓴 직원 1위로 꼽혔을 정도입니다. "

▼영어를 많이 쓰겠네요.

"업무의 90%가량은 영어로 해요. 그래서 우리끼리 농담 삼아 '영어로 싸울 수 있어야 한다'고도 하죠.사실 국내에 해외 미디어 플래너의 숫자가 적은 것은 영어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저는 아버지 덕에 학창시절 11년가량을 미국 등 해외에서 지내서 영어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

▼어떤 계기로 해외 미디어 플래너가 됐습니까.

"저는 대학(연세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어요. 졸업 후 현대차에 입사해 해외부품개발팀에서 엔진 관련 부품을 개발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재미없더라고요. 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 취업정보실의 소개로 2001년 한 광고회사로 옮겨 미디어 플래너 일을 시작했죠.처음엔 국내 매체를 담당하다 2005년 이노션으로 옮기면서 해외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

▼미디어 플래너들이 대개 광고나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는 것과는 다른데요.

"매체기획 업무가 꽤 과학적이에요. 보통 광고 분야가 감성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는 데 비해 미디어 플래닝은 계량화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라고 할 수 있죠.시청률과 열독률,발행 부수,매체 선호도,소비자 취향 등의 수치를 분석해서 광고 집행의 필요성이나 타당성을 끌어내야 합니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매체기획이 점점 중요해지는 추세예요. 광고예산의 90% 이상이 매체비용이니까요. "

▼수많은 매체를 상대하다 보면 돌발상황도 생기겠군요.

"최근 칠레에서 강진이 발생했잖아요. 그럴 때면 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산티아고 지역에 세운 대형 옥외 광고판이 무너질까봐,그리고 야간 조명이 깨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거죠.다행히도 별 일은 없었지만 해외 매체기획을 하다 보면 전 세계 소식에 귀를 쫑긋하게 됩니다. 국가별로 어떤 이슈가 있는지,천재지변이 끼치게 될 영향은 무엇인지 늘 뉴스를 체크해야 해요. 환율도 중요한 이슈입니다. 가령 베네수엘라에서 대통령 선거를 한다면 특집방송이 많이 편성될 테죠.그러면 현대차 광고 집행도 영향을 받거든요. 해외 미디어 플래너는 아는 게 많고 똑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수많은 국가를 상대로 일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겠어요.

"대금청구서를 연필로 써서 가져 온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가 있었어요. 내용이 잘못됐다고 지적하자 지우개로 지우더군요. 또 다른 나라에선 히브리어로 작성한 문건을 보내왔는데 상황이 워낙 긴박해서 제가 급히 히브리어책을 보면서 해석한 적도 있었어요. 이탈리아의 경우 로마와 밀라노 등엔 1000년도 넘은 옛 건물이 많아서 옥외 광고판을 세우려면 일일이 문화재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사진을 찍는 게 불법이래요. 그래서 광고 집행을 증명하는 사진을 찍을 땐 출장 간 직원이 목숨을 건다고 하더군요. "

▼스트레스도 많이 받죠?

"저는 한국에서 일하니까 같은 시간대에 전 세계 매체에서 발생하는 일을 모두 알 수는 없어요. 그래서 돌발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즉각 대처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현지 대행사에서 관할하지만 제 눈으로 볼 수 없으니 답답하죠.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습니다. 아이를 보면서도 스마트폰으로 이메일을 체크해야 안심이 돼요. "

▼올해는 월드컵 등 국제적인 이슈가 있는데요.

"미디어 플래너에겐 광고주를 알리기 위한 최고의 기회입니다. 현대차는 남아공 월드컵의 공식 후원사이기 때문에 다양한 광고와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CNN,내셔널지오그래픽,메트로 등 해외 유수의 언론매체들과 멀티미디어 전략을 기반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전 세계 축구팬들을 공략할 예정입니다. 이 밖에도 현대차의 브랜드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기업PR 영상을 전 세계에 내보낼 계획이에요. 올해는 지난해보다 광고 집행 건수가 30% 이상 증가할 것 같습니다. "

▼뿌듯함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제 손을 통해 전 세계 수많은 매체에 집행한 광고 덕분에 우리 기업의 세계적인 브랜드 이미지가 업그레이드됐다고 느낄 때죠.광고주가 기술력과 품질을 갖춘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거리에 현대차가 점점 많아지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게 바로 애국이 아닐까요. "

글=김정은/사진=김병언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