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부터 1910년까지 격동의 시기를 기록한 역사서 《매천야록》을 남긴 매천 황현(1855~1910)은 한일병합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진 그날 밤 아편을 먹고 자결했다. 운명하기 전 그는 절명시 네 수를 남겼는데,'요사스런 기운이 가려 임금별 자리를 옮기니/구중궁궐 침침해져 햇살도 더디 드네'라고 탄식한 뒤 '내 일찍이 나라를 버티는 데 서까래 하나 놓은 공도 없으니'라고 자신을 책망했다.

올해는 경술국치를 당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은 일본도 놀랄 정도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아픈 역사도 역사다. 그때 우리 선조들의 절절했던 치욕과 분노,고통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서울 도심을 둘러봤다.


◆순종의 한이 맺힌 창덕궁

1910년 8월22일 을사오적 중 하나인 이완용은 어전회의를 주도하며 강제병합을 밀어붙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곳이 서울 종로구 창덕궁의 대조전 홍복헌이다. 원래 홍복헌은 순종이 집무를 보던 장소가 아니었다. 홍복헌은 왕비의 침전이었다. 복을 북돋운다는 이름과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는 게 역설적이다. 창덕궁 구석에 조그맣게 자리잡고 있는 이곳에는 아직도 순종이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느낀 비감이 서린 듯하다. 현재의 홍복헌은 나중에 복원된 건물.

조선의 마지막 군주였던 순종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곳도 창덕궁이다. 1926년 순종은 창덕궁 대조전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또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비,고종의 셋째 아들이자 순종의 동생인 영왕 이은,고종의 딸 덕혜옹주 등 조선황실 황족들은 낙선재에 머물다 숨을 거두었다. 쓸쓸한 조선황실의 혼령이 떠돌법한 궁이다.

창덕궁을 관람하려면 오전 9시15분부터 4시15분 사이 매시 15분 · 45분에 입장해야 하고,직원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이 일반관람 시간은 3월 기준으로 달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단,매주 목요일에는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고,입장 가능 시간은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4시30분까지다. 월요일에는 쉰다. 일반 관람료는 성인 3000원(어린이와 청소년 1500원)이며,자유 관람의 경우 성인 1만5000원(어린이와 청소년 7500원)이다. 옥류천,낙선재까지 관람하려면 별도의 요금(5000원)을 내야 하며 정해진 시간에 가서 안내를 받아야 한다. (02)762-8261


◆위엄을 잃어버린 경복궁

궁의 수모는 일제강점기 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역사연구가 이순우씨의 저서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에 따르면 서울 종로구 경복궁도 강점기 내내 몸살을 앓았다. 굴욕의 시작은 경술국치 1년 후인 1911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의 관할권을 가져가면서였다. 경복궁은 결국 1915년 전시장으로 전락했다. 그해 열린 대규모 박람회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기간 중 강녕전과 교태전 등은 전시장으로 일반에 개방됐다. 이후에도 경복궁은 여섯 차례 이상 박람회장으로 쓰였다.

아름다운 경회루와 위엄을 과시했던 근정전에서는 온갖 연회와 기념식이 벌어졌다. 그때마다 총독들은 근정전 단상에 올라갔다. 그 자리에 원래 용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통탄할 노릇이다. 심지어 20년 가까이 속칭 '순사',선량한 조선인들을 억압하는 데 앞장섰던 일본 순직경찰관들을 위한 초혼제도 근정전에서 열렸다. 이 기간 중 용상이 있던 자리에는 조선인들을 괴롭히다 숨을 거둔 자들을 위한 제단이 놓였다. 이씨는 "까딱했더라면 이곳이 조선의 야스쿠니 신사로 굳어질 뻔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라고 평했다.

경복궁 관람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입장은 오후 5시까지)이며,관람료는 성인 3000원 · 어린이 및 청소년 1500원이다. (02)3700-3900


◆경술국치의 정점,남산 통감관저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서울 남산 인근도 국치의 장소다. 남산 서울소방방재본부 공터에는 일제 강점기 때 권력의 핵이었던 통감관저가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숨을 거둔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인 통감들이 거주하고 집무를 보던 곳이다.

이곳에서 이완용은 경술국치의 정점을 찍었다. 창덕궁에서 열린 마지막 어전회의 후 이완용은 통감관저로 달려와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을 만났다. 그리고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통감관저는 총독관저가 되어 조선을 수탈하는 온갖 계책을 쏟아냈다. 서울시는 곧 이 자리에 표지석을 세울 예정이라고 하니,그전에라도 이곳을 지나치게 되면 한 번 정도 유심히 눈길을 주도록 하자.


◆탑골공원과 서대문형무소

망국의 한을 떨쳐내려는 기운이 대대적으로 폭발한 장소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이다.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월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리고 같은 시간 평범한 조선인들은 탑골공원에 모여 만세를 부르며 일제에 항거했다. 3 · 1운동의 시작이었다. 탑골공원에서 불꽃이 튄 3 · 1운동은 금방 서울을 넘어 전국으로 확대되며 한민족의 기개를 과시했다. 이 한 해 동안 3 · 1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줄잡아 200만명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일제는 뜻있게 일어난 사람들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로 보냈다. 1907년 세워진 이 형무소는 3 · 1운동 이후 3000여명을 수감할 수 있는 규모를 갖췄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고문 등 온갖 고초를 견뎌내야 했다. 유관순 열사도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옥사와 사형장,유관순 지하옥사 등을 볼 수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3~10월)이며 관람료는 성인 1500원,청소년 1000원,어린이 500원이다. (02)360-8590~1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