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18개월이 지났지만 미국은 아직도 금융개혁 방안을 논의 중이다. 의료보험 개혁은 대규모 예산이 투입돼야 하는 정치적으로 민감안 사안인 만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명분있는 금융개혁이 겉도는 이유는 뭘까.

아무리 시장경제 원리를 중시해도 은행에 대한 적절한 감독과 규제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탈(脫)금융규제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로버트 엥글 뉴욕대 교수는 최근 한 세미나에서 "정부가 은행에 대해 예금 지급을 보장해주는 특혜를 부여하면서도 은행 규제는 통신 전력 등 다른 산업과 똑같이 푼 게 금융위기의 불씨가 됐다"고 지적했다.

은행 사업은 본래 취약할 수밖에 없다. 빚(예금)을 내서 자산(대출)을 운용함으로써 수익을 내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미국 은행은 평균적으로 자기자본의 12배가량의 빚을 지고 있다. 달러당 자산가치가 9센트만 내려가도 거덜이 난다. 게다가 은행 자산은 시장에서 곧바로 유동화할 수 없다. 재무구조가 탄탄해도 특수한 상황에서 빚 상환요구가 몰리는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사태)'이 빚어지면 온전하게 살아남을 곳은 별로 없다.

그런데도 미국 금융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먼저 규제 대상인 월가 금융사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월가 금융사들은 한사코 위기 이전으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다. 사활을 건 로비를 벌이고 있다. 루스벨트연구소의 에리카 페인 선임고문은 "지난 14개월간 월가 금융사들이 로비에 쓴 돈이 4억달러에 달한다"고 말했다. 금융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복잡한 감독기구 체계도 개혁에 걸림돌이다. 이를 테면 미국에는 연방 감독기구만 7개에 달한다. 별도의 예산과 인력을 쥐고 역할을 하고 있지만 소비자들이 피해를 봤을 때 누가 책임을 질지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금융개혁 논의가 본격화될 때마다 주도권을 누가 쥘지를 놓고 목소리를 높인다.

마지막으로 섣부른 규제도입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최근 미국에서 신용카드 규제법을 도입하자 카드사들은 서둘러 금리를 올리고 한도를 줄이면서 소비자들이 오히려 피해를 보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규모 회계부정 사건인 엔론 사태 이후 경영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2002년 사베인스-옥슬리법을 도입했을 때도 기업들이 미국을 떠나는 예기치 못한 결과가 빚어졌다. 작년 말 시카고대와 조지메이슨대의 공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오바마 정부의 금융규제 부담으로 금리가 오르고 신용공여가 감소해 신규 일자리 창출이 4.3%가량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섣부른 규제로 자칫 30~40년간 누렸던 금융 초강대국 지위를 잃고 종국에는 미국 경제에 부담을 줄 것이란 인식도 뿌리가 깊다. 모리스 그린버그 전 AIG 회장이 5일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에서 금융개혁 논의를 염두에 두고 "미국을 싸게 팔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금융 초강국 지위도 지키면서 또다른 금융위기를 막을 수 있는 묘안을 찾아야 하는 딜레마 탓에 미국의 금융개혁은 더딜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뉴욕=이익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