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역사를 보면 위기 이후에는 매번 시장 질서와 룰의 큰 변화가 뒤를 이었다.

미국 신탁회사 부실에서 비롯된 1907년 10월의 20세기 첫 금융위기 때는 탄력적인 통화공급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탄생했다.

또 1929년 증시 대폭락과 뒤이은 대공황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는 글래스-스티걸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저금리를 틈 탄 금융회사들의 투기적인 행태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 법은 1999년 그램리치브릴리법으로 은행 · 증권 분리가 완화될 때까지 66년간 월가를 지배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1987년 10월의 '블랙 먼데이' 때는 주가가 크게 떨어지면 거래를 일시적으로 강제 중단시키는 '서킷브레이커'제도가 도입됐다. 기계적으로 주식을 거래하는 프로그램매매 등의 영향으로 주가 하락폭이 더 커지는 사태가 재연되는 것을 차단하는 대책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촉발된 최근의 금융위기 역시 예외가 아니다. 폴 볼커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장이 은행의 자금운용을 제한하는 이른바 '볼커 룰'을 추진하고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위대한 변화'를 기치로 당선된 오바마 대통령은 월가의 반대 목소리를 무릅쓰고 볼커의 주장을 받아들여 금융개혁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EU의 리더 국가인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도 "글로벌 금융질서가 바뀌어야 한다"며 지원사격에 나서고 있어 세계 금융시장에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이 같은 해외 상황의 변화는 우리 금융업체엔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미국과 유럽 글로벌업체들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만큼 국내 업체들이 진출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부의 행보는 현상유지 차원에 급급한 인상이다. 금융의 큰 틀을 짜는 금융위원회는 그동안 추진해왔던 은행 대형화나 글로벌 투자은행(IB) 육성 조차 미온적이다. 거대 금융회사의 사고로 시스템 리스크가 커지는 걸 막아야 한다는 이른바 '대마불사' 이슈가 해외에서 부상하고 있는 것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나가려는 우리 자본시장을 선진시장과 단순 비교해 규제를 강화하려는 정치권 일각의 반대를 뚫어낼 논리 개발과 적극성이 부족하다.

대형IB를 만들자는 자본시장법이 시행 1년여가 지났지만 변화의 실마리가 없는 것은 이런 사정에서다. 증권사의 실력과 규모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일괄적인 진입장벽은 여전하고 헤지펀드는 막혀 있다. 혁신적인 신상품도 찾아보기 힘들다.

무조건 틀어막고 있으면 사고는 막을 수 있겠지만 세계 일류도 될 수 없다. 그런 만큼 위기 이후 자본시장 청사진을 빨리 만들어야 한다. 국내 한 대형 증권사 사장은 "글로벌 금융시장은 늘 막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며 "이번 위기가 끝나면 그동안 어떻게 미래를 준비했느냐에 따라 국내외 IB들 간 우열이 뚜렷하게 갈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최근 한 세미나에서 "글로벌 위기로 금융선진국들이 위축된 지금이 우리에게는 금융허브로 도약할 기회"라고 강조한 의미를 곱씹어봐야 할 때다.

백광엽 증권부 차장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