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0월27일 미국 주가가 사상 최대의 폭락을 기록했다. '블랙먼데이'로 불리는 날이었다.

다음 날인 28일,미국 펜실베이니아 외곽에 있는 자산운용사인 뱅가드그룹 사옥에는 아침부터 스위스 국기가 휘날렸다. 전시 스위스 군대처럼 모든 직원들에게 최전선인 고객과의 상담자리로 나가라는 신호였다. 사장,부사장은 물론 수백명의 펀드매니저들이 전화기 앞으로 달려갔다. 패닉에 빠진 고객들에게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이날 뱅가드 본사로 걸려온 전화는 무려 7만5000통.하지만 대기시간은 15초를 넘지 않았다. 고객들은 일시적으로 손실을 입었지만 뱅가드에 대한 신뢰는 변치 않았다.

2007년 미국의 저가항공사 젯블루는 위기를 맞았다. 미국 동북부의 폭설로 항공기 이착륙이 중단되고 고객들의 손발이 묶였다. 서비스 좋기로 유명한 항공사였기에 충격이 컸다. 이 회사의 창업자이자 CEO(최고경영자)인 데이비드 닐먼은 잽싸게 움직였다. 즉각 미 CBS-TV의 '데이비드레터맨쇼'에 출연,지연사태에 대해 사과했다. 또 유튜브에 '고객에 대한 약속'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올리고 발빠르게 고객 보상대책을 발표했다. 기업 위기 대응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세계를 들썩이게 만든 최근 도요타의 위기 대응은 이들 기업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컨설턴트인 김윤재 법무법인 원 변호사는 "위기를 잘 극복한 기업들은 대부분 '휴먼 페이스(human face)'가 되어 고객의 입장에서 모든 일에 대처했다. 그러나 도요타는 기술적으로 접근하며 위기를 증폭시켰다"고 평가했다. 국내 한 대기업 일본 지사는 최근 '위기의 도요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도요타 위기원인을 분석했다. 도요타의 위기는 어떤 기업에도 불시에 찾아올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기술 자신감이 고객을 뒷전으로

도요타 위기가 증폭된 가장 큰 원인은 초기 대응 실패였다. 브레이크 문제로 사망사고가 일어났지만 수개월간 고객을 안심시킬 만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보고서는 "도요타의 실패는 기술적인 해석에 얽매여 고객의 기대에 빗나간 대응을 한 것에 있다"고 지적했다. 고객들은 가속페달 문제를 신속히 해결해줄 것을 원했지만 도요타는 원인분석에 매달리며 리콜을 미뤘다. 일부 경영진은 "운전자 감각의 문제다. 브레이크를 더 밟으면 확실하게 멈춘다"고 강변하기까지 해 고객들의 불신을 더욱 키웠다. 이 보고서는 "도요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간에 최종적으로 품질을 판단하는 것은 소비자이며,그들은 불안해했다"며 도요타 대응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처럼 뒤늦은 대응의 이면에는 과도한 자신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도 내놨다. 한 평론가는 "도요타 본사 일부에는 '우리 자동차 품질은 완벽한데 운전자가 문제'라는 인식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 최고 품질의 자동차를 만든다는 명성을 쌓아온 도요타에는 이미 1990년대부터 이런 분위기가 있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품질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은 문제발생 초기 신속한 대응을 가로막은 장벽이 됐다는 얘기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CEO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교훈으로 제시했다. 도요다 아키오 사장은 사태가 벌어진 지 수개월이 지나서야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리에서도 구체적 대안 제시 없이 "우리를 믿어달라"는 말만 연발했다. 사고가 터지자 발빠르게 사과 메시지와 수습대책을 담은 동영상을 마련해 유튜브에 올려 언론으로부터 "이런 발빠른 위기수습책을 본적이 없다"는 찬사를 받았던 젯블루 CEO를 새삼 떠올리게 만드는 대응이었다.



◆조직 급속성장,역량은 못 따라 가고

이번 위기의 구조적 원인을 '독자적으로 모든 일을 수행한다'는 도요타 특유의 기업문화에서 찾는 분석도 나왔다. 자전주의(自前主義)라 불리는 것이다. 도요타 전 간부는 "도요타는 다른 곳에 일을 맡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이것은 강점이자 약점"이라고 말했다. 다른 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기술력을 키워온 것이 경쟁력의 원천이었지만 글로벌 1위에 오른 기업규모는 더 이상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지적이다.

이는 도요타의 글로벌 경영능력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도요타는 해외공장을 세울 때마다 일본에서 인재를 대거 파견했다. 이 공백을 메워줄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도요타 조달담당자가 자꾸 바뀌었다. 부품을 파악하는 능력도 떨어지고 새로운 장착방법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불안했다"는 한 협력업체 사장의 말로 공백을 설명했다.

이는 비단 도요타의 문제만은 아니다. 업계 전문가는 "자동차에 요구되는 사양은 더 복잡해지지만 도요타의 조직능력은 이를 완벽히 따라잡지 못했다. 이는 도요타뿐 아니라 세계 모든 자동차업체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고급자동차가 고도의 전자제품으로 변화하고 있는 추세에 대응해야 하고,하이브리드카도 만들면서 개발도상국용 저가자동차도 만들어야 하는 모든 자동차 기업이 당면한 숙제라는 것이다.

김윤재 변호사는 "고객의 작은 불만에 귀 기울여 이를 조기에 해결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면 도요타사태는 국내 어떤 기업에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며 "세계 1위에 올랐을 때 기업들이 혁신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요타는 잘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