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욱의 명품차 이야기] 폭스바겐의 플래그십 모델 '페이톤'이 탄생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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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바겐에 대한 일화는 일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가장 극악무도했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어른 2명에 아이 3명이 탈 수 있고, 리터당 14.5㎞의 연비로 시속 100㎞ 이상을 달리고,정비가 쉽고 값싼 차'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바로 '독일 국민 1가구당 1대의 차'라는 모토로 국민차 사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폭스바겐'이란 이름도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국민의 차'란 뜻이다.
당시 기술력으로 어려울 것만 같았던 임무를 맡은 것은 천재적인 자동차 박사 '페르디난트 포르쉐'였다. 그는 3년여 만에 '비틀'의 원형을 만들어 냄으로써,불가능할 것으로 여겼던 임무를 완수해 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비틀'의 원형은 군용차로 개조되어 활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세가 역전돼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독일은 패전의 멍에를 쓰고 피폐화된다. 물론 폭스바겐의 자동차 생산공장 역시 폭격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스바겐은 전쟁으로 무너진 독일 재건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연합군이던 영국군에서 비틀의 원형을 개조한 군용차를 주문하면서 월 1000대 이상 생산하는 등 회사 재건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1945년 국영회사로 시작한 폭스바겐은 1948년 비틀을 정식 생산하며 독일 최대의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했다. 전쟁으로 인해 피폐화된 국토뿐 아니라,참전국들에 대한 피해보상금 등으로 막막했던 독일은 폭스바겐을 통해 회생의 기회를 찾았다. 이렇듯 역사적인 사실만으로도 폭스바겐은 진정한 '국민차'로서 독일인들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폭스바겐은 이후 세아트,스코다,부가티,람보르기니,벤틀리,아우디 등 세계 유수의 메이커들을 인수하면서 유럽 최대의 자동차 그룹으로 부상하기도 했으나,고민에 빠지게 된다. '국민차'를 모토로 실용적이고 대중적인 중소형차 중심의 모델을 생산하다 보니,수익성의 문제가 생겼다. 당시 소비자들의 트렌드를 만족시키기 위해 앞다퉈 고급화를 선언하던 자동차 업체들과의 싸움에서도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세계적인 자동차 업체에 메이커를 대표할 만한 '기함'모델이 없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결국 2005년 폭스바겐은 자사의 기함 '페이톤'을 내놓는다. 폭스바겐 역사상 가장 럭셔리하면서 가장 중후한,그러면서도 폭스바겐의 기술력이 모두 집약된 모델이다. 페이톤은 독일 드레스덴 지역의 2만5000평 부지에 '투명 유리 공장'을 짓고 생산된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폭스바겐 내 최고의 장인들이 90% 이상 수작업을 통해 제작하기에 하루 30대 이내만 생산된다. 개발 단계부터 페이톤 만을 위해 100개 이상의 새로운 특허를 받았을 정도로 편의사항 역시 여타 프리미엄 세단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폭스바겐의 이미지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이미지 리딩 모델이자,기함으로써 플래그십 모델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닌 페이톤은 생산 직후 판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최고급만을 추구하는 프레스티지 고객들이 가지고 있던 '대중적인 폭스바겐'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페이톤의 베이스를 벤틀리의 플라잉스퍼,컨티넨탈 GT와 공유함은 물론 아우디 A8와는 파워트레인까지 공유한다는 점에서도 페이톤의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2006년 판매부진으로 북미시장에서 페이톤을 철수시키게 되는데,철수 이후 최고급 모델인 W12의 중고차 가격이 판매 당시 신차가격보다 높아지면서 페이톤의 진가가 새롭게 조명받기도 했다.
수입차포털 겟차 대표 choiwook@getcha.co.kr
당시 기술력으로 어려울 것만 같았던 임무를 맡은 것은 천재적인 자동차 박사 '페르디난트 포르쉐'였다. 그는 3년여 만에 '비틀'의 원형을 만들어 냄으로써,불가능할 것으로 여겼던 임무를 완수해 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비틀'의 원형은 군용차로 개조되어 활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세가 역전돼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독일은 패전의 멍에를 쓰고 피폐화된다. 물론 폭스바겐의 자동차 생산공장 역시 폭격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스바겐은 전쟁으로 무너진 독일 재건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연합군이던 영국군에서 비틀의 원형을 개조한 군용차를 주문하면서 월 1000대 이상 생산하는 등 회사 재건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1945년 국영회사로 시작한 폭스바겐은 1948년 비틀을 정식 생산하며 독일 최대의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했다. 전쟁으로 인해 피폐화된 국토뿐 아니라,참전국들에 대한 피해보상금 등으로 막막했던 독일은 폭스바겐을 통해 회생의 기회를 찾았다. 이렇듯 역사적인 사실만으로도 폭스바겐은 진정한 '국민차'로서 독일인들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폭스바겐은 이후 세아트,스코다,부가티,람보르기니,벤틀리,아우디 등 세계 유수의 메이커들을 인수하면서 유럽 최대의 자동차 그룹으로 부상하기도 했으나,고민에 빠지게 된다. '국민차'를 모토로 실용적이고 대중적인 중소형차 중심의 모델을 생산하다 보니,수익성의 문제가 생겼다. 당시 소비자들의 트렌드를 만족시키기 위해 앞다퉈 고급화를 선언하던 자동차 업체들과의 싸움에서도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세계적인 자동차 업체에 메이커를 대표할 만한 '기함'모델이 없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결국 2005년 폭스바겐은 자사의 기함 '페이톤'을 내놓는다. 폭스바겐 역사상 가장 럭셔리하면서 가장 중후한,그러면서도 폭스바겐의 기술력이 모두 집약된 모델이다. 페이톤은 독일 드레스덴 지역의 2만5000평 부지에 '투명 유리 공장'을 짓고 생산된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폭스바겐 내 최고의 장인들이 90% 이상 수작업을 통해 제작하기에 하루 30대 이내만 생산된다. 개발 단계부터 페이톤 만을 위해 100개 이상의 새로운 특허를 받았을 정도로 편의사항 역시 여타 프리미엄 세단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폭스바겐의 이미지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이미지 리딩 모델이자,기함으로써 플래그십 모델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닌 페이톤은 생산 직후 판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최고급만을 추구하는 프레스티지 고객들이 가지고 있던 '대중적인 폭스바겐'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페이톤의 베이스를 벤틀리의 플라잉스퍼,컨티넨탈 GT와 공유함은 물론 아우디 A8와는 파워트레인까지 공유한다는 점에서도 페이톤의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2006년 판매부진으로 북미시장에서 페이톤을 철수시키게 되는데,철수 이후 최고급 모델인 W12의 중고차 가격이 판매 당시 신차가격보다 높아지면서 페이톤의 진가가 새롭게 조명받기도 했다.
수입차포털 겟차 대표 choiwook@getch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