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여백의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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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무차 시내 모처를 방문했다. 운전을 잘하는 윤 팀장이 휴가인지라,운전을 못하는 양 주임이 나를 수행한다며 조수석에 동승했다. 약속 장소는 내가 잘 아는 곳이었기에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러나 잘 안다고 생각했던 시내 길엔 좌회전,유턴이 안 되는 길이 어찌나 많던지 우리는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30여분을 헤매야 했다. 걸으면 5분 거리에 목적지를 두고 양 주임은 조수석이 바늘방석처럼 여겨졌던지 쩔쩔매는 모습이 역력하더니 결국 혼자 슬그머니 내비게이션을 켠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지난번 회식 때도 그랬다. 직원들이 모두 스마트폰을 탁자에 꺼내놓고 디지털 예찬을 하는 중에도 나는 무심히 흘려 들었다.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복잡하고 까다로웠던 아날로그는 빠르고,값싸고,쉬운 디지털로 대체됐다. 사람들의 생활은 이전보다 빠르고 편리해졌지만 그 욕심은 끝이 없다. 그 때문일까. '더 빨리,더 편하게' 모든 걸 해결하려는 풍토에 대한 우려도 커진다.
간혹 교제 중인 젊은 미혼 남녀들은 "상대가 멀리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밖에 만나지 못 하니까 안 만날래요", "그 사람은 문자를 잘 보내지 않는 걸 보니 저에게 관심이 없나 봐요", "좋아한다면 하루에 열 두 번은 연락 못하겠어요" 등의 불평을 한다.
디지털과 함께 커온 그들은 자극-반응이 1분도 안돼 이뤄지는 것이 익숙하고,기다림과 여운이 불편하다. 오랜 거리를 기차를 타고 달려 연인을 보는 설렘도,시간을 들여 사람을 알아가는 즐거움도,기다림의 아름다운 여백을 느낄 여유도 없는 그들 앞에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속도전에 익숙한 그들에게 향기 나는 진득한 사랑을 기대하고,차분히 삶이 주는 행복감을 맛보라고 하는 것은 디지털이 갖지 못하는 아날로그만의 매력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여백의 미'다.
채워지지 않은 것에서 비로소 가지고 있는 것의 매력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기다림과 관조의 여유가 있을 때 우리의 삶은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개인의 행복에 대한 감각이 깨어나는 것도 이러한 여백의 미가 함께 할 때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내비게이션에서 "목적지 근처입니다"라는 친절한 안내 멘트가 들려온다. "아,첫 번째 갈림길에서 좌회전,그 다음에 세 번째 차선,그 다음에 좌회전 해야 한번에 갈 수 있구나"라고 무릎을 치는 아날로그형 인간을 바라보는 양 주임의 눈에는 제 시간에 도착했다는 안도의 빛이 서린다.
김 혜 정 듀오정보 대표 hjkim@duonet.com
그러나 잘 안다고 생각했던 시내 길엔 좌회전,유턴이 안 되는 길이 어찌나 많던지 우리는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30여분을 헤매야 했다. 걸으면 5분 거리에 목적지를 두고 양 주임은 조수석이 바늘방석처럼 여겨졌던지 쩔쩔매는 모습이 역력하더니 결국 혼자 슬그머니 내비게이션을 켠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지난번 회식 때도 그랬다. 직원들이 모두 스마트폰을 탁자에 꺼내놓고 디지털 예찬을 하는 중에도 나는 무심히 흘려 들었다.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복잡하고 까다로웠던 아날로그는 빠르고,값싸고,쉬운 디지털로 대체됐다. 사람들의 생활은 이전보다 빠르고 편리해졌지만 그 욕심은 끝이 없다. 그 때문일까. '더 빨리,더 편하게' 모든 걸 해결하려는 풍토에 대한 우려도 커진다.
간혹 교제 중인 젊은 미혼 남녀들은 "상대가 멀리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밖에 만나지 못 하니까 안 만날래요", "그 사람은 문자를 잘 보내지 않는 걸 보니 저에게 관심이 없나 봐요", "좋아한다면 하루에 열 두 번은 연락 못하겠어요" 등의 불평을 한다.
디지털과 함께 커온 그들은 자극-반응이 1분도 안돼 이뤄지는 것이 익숙하고,기다림과 여운이 불편하다. 오랜 거리를 기차를 타고 달려 연인을 보는 설렘도,시간을 들여 사람을 알아가는 즐거움도,기다림의 아름다운 여백을 느낄 여유도 없는 그들 앞에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속도전에 익숙한 그들에게 향기 나는 진득한 사랑을 기대하고,차분히 삶이 주는 행복감을 맛보라고 하는 것은 디지털이 갖지 못하는 아날로그만의 매력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여백의 미'다.
채워지지 않은 것에서 비로소 가지고 있는 것의 매력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기다림과 관조의 여유가 있을 때 우리의 삶은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개인의 행복에 대한 감각이 깨어나는 것도 이러한 여백의 미가 함께 할 때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내비게이션에서 "목적지 근처입니다"라는 친절한 안내 멘트가 들려온다. "아,첫 번째 갈림길에서 좌회전,그 다음에 세 번째 차선,그 다음에 좌회전 해야 한번에 갈 수 있구나"라고 무릎을 치는 아날로그형 인간을 바라보는 양 주임의 눈에는 제 시간에 도착했다는 안도의 빛이 서린다.
김 혜 정 듀오정보 대표 hjkim@duo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