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책임'(SR) 하면 으레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떠오른다. 하지만 양자는 다른 개념이다. 부지불식간에 우리 사회는 기업에 정상적인 경영활동 이외에 사회에 대해 '별도의' 책임을 부과해 왔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존재한다면,"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한 여타 주체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마땅하다. 그러한 반대질문은 없다. 원래 책임은 권한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균형추(錘)다. 따라서 책임을 물으려면 먼저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 그러나 기업에 계약 내용 이상으로 권한을 위임한 주체는 없다. 한국의 현실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관습법'과도 같다.

사회책임에 대한 국제표준기구의 초안이 지난 2월14일 참가국의 표결을 통해 최종안으로 채택됐다. 이제 한 차례 표결만 더 거치면 올 가을께 '국제표준'(ISO 26000)으로 정식 확정된다. 국제표준 확정이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유감스럽게도 최종안에 대한 이해가 태부족하다. 우선 ISO 26000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기 위한 국제 공조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ISO 26000의 기본 취지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넘는 것(beyond CSR)"이다. 기업,소비자,노조,정부,시민단체 등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주체 간의 책임이 균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즉 사회책임의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인 것이다. 그리고 ISO 26000은 '제3자에 의한 인증'을 요구하지 않는다. 개방과 합의에 기초한 '자발적 준수'일 뿐이다. 국제표준은 이해당사자의 동의에 기초하고 적법한 절차에 의해 결정된,특정 행위 및 행위의 결과에 대해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준과 지침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실상 관행으로 정착되면 규제 내지 입법보다 더 구속적일 수 있다.

ISO 26000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지배구조 개선,인권,노동개선,환경보호,공정거래관행,소비자이익,사회개발'의 7대 핵심가치 실현을 위해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해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처럼 ISO 26000의 기본철학은 "사회책임의 균형과 조화를 통한 공동선의 실현"인 것이다. 따라서 여론의 힘을 빌려 특정 주체의 부담을 가중시키거나 경감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유감스럽게도 이 같은 조짐이 보이고 있다.

기업이 사회공헌과 윤리경영을 통해 '지배구조' 개선요구를 피해간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배구조 개선이 '이해관계자의 경영참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배구조 개선요구가 사적 자치 및 경영권 침해로 비약돼서는 안 된다.

사회책임은 그 국제표준을 떠나 한국적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사회는 권리와 의무,책임과 권한의 배분이 비대칭적이기 때문이다. 권한을 누리되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고 권리를 주장하되 의무수행에는 소홀하다. 비근한 사례로 사법권 강화와 독립은 꾸준히 강조돼 왔지만 사법의 사회적 책임은 그렇지 않았다. '사법판단의 예측 가능성'은 판사의 양심에 의해 덮였다. 노조의 사회적 책임은 그 자체가 사각지대였으며,언론의 사회책임도 이념 편향의 벽을 넘지 못했다. 기업도 시혜적인 사회공헌과 선언적인 윤리경영의 틀을 벗지 못해 '기업시민'으로서의 사회책임에 충실하지 못했다.

한국은 GDP로 세계 15위 경제대국이지만 선진국이라 말할 수 없다. 사회구성원 간 신뢰가 여전히 낮기 때문이다. 신뢰와 협력 그리고 시민의식 같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확충돼야 한다. 사회책임은 이제 국제표준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자본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사회책임에 대한 인식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회책임'을 다시 생각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