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전 잡지 <삼천리>가 조사한 여자 가수 인기순위를 보니 1위와 2위,5위를 차지한 사람이 모두 기생 출신인 왕수복,선우일선,김복희였군요.

초창기 영화에 출연한 배우도 기생 출신이 많습니다. 1923년 '월하의 맹세'라는 영화에 출연한 이월화는 여장 배우가 아닌 여자로서 카메라 앞에 선 최초의 배우였죠.기생 출신인 이월화와 석금성,복혜숙이 여배우 트로이카를 이뤘고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 출연한 신일선도 높은 인기를 누렸으니 당시 대중문화는 기생이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군요. 신문과 잡지의 광고모델로도 장연홍,노은홍 같은 기생들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그뿐인가요. 초창기 미술 전람회 모델도 권번 기생이 거의 장악했고,각종 행사에는 기생의 공연이 늘 따랐습니다. 오늘날의 연예인과 흡사하죠.

신현구 중앙대 교수가 펴낸 《기생,조선을 사로잡다》(어문학사 펴냄)에 나오는 얘기들입니다. 신 교수는 《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평양기생 왕수복,10대 가수 여왕되다》를 펴낸 저자이기도 하지요. 그가 이번에는 일제 강점기 기생의 모습과 그들의 삶을 재조명했습니다. 전통무용이나 음악만 담당하던 기생이 음악기생,무용기생,극단 여배우,대중가요 가수 등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생생합니다.

그는 "당시 기생들은 당당한 엔터테이너로서 여성예술사와 문화사회사 등을 새롭게 구축한 선구자였다"면서 "그 무렵 기생은 한쪽에서 보면 봉건적인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제적인 면에서는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스타로 대우받았던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흥미 위주로만 읽다가 기생들이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선 대목에서 안경을 고쳐 썼습니다. 술과 웃음을 팔아 모은 90전의 돈을 독립협회에 보낸 인천 상봉루의 기생 9명,검진을 받기 위해 자혜병원에 가던 중 경찰서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고 병원에 가서도 만세를 부른 수원기생조합 소속 기생 일동,소설 <운수 좋은 날>을 쓴 현진건의 형인 남편 현정건을 따라 조선 독립운동에 몸 바친 현계옥….수많은 '기생 독립투사'의 사연을 읽으면서 경술국치 100주년의 지금 우리를 돌아봅니다.

문화부 차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