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마침 문을 들어서려고 하는데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눈에 띈다. 그를 의식하면서 살며시 문을 내 앞으로 잡아당긴다. 한데 불쑥 그가 (또는 그녀가) 열린 문을 밀치다시피 하고는 밖으로 나선다. 하마터면 문에 부딪쳐서 이마를 찧을 뻔한 게 괘씸해서 소리 안 나게 불쑥 한마디,'이 망나니!'하고 마음속으로 삼킨다. 그러곤 쥐 쫓는 고양이 꼴의 그 뒷모습을 노려보는 것으로 겨우 분을 푼다.
한데 방향이 정반대로 엇비슷한 꼴을 당하게도 된다. 건물 안에 들어서기 위해서 문을 잡아당겨서 여는 바로 그 찰나,뒤에서 바싹 따라오던 낯선 사람이 열린 문 사이를 활개치고 먼저 들어선다. 그런 경우 제가 무슨 대감 행차하듯이 '물렀거라!'를 했으니,나는 졸지에 그의 종복이 되고 만다.
건물의 문 앞에서 겪는 이 딱한 꼴이 자동차 도로에서도 판박이로 되풀이되고 있다. 좌우 회전 신호등도 미처 켜지 않은 채로,또 도로교통법으로 지키게 돼 있는 간격의 길이도 무시한 채 불쑥불쑥 끼어들기를 하는 차들이라니… 길거리에서 그런 염치없고 약삭빠른 꼴은 쌔고 쌨다. 차량 운전자나 보행자나 남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그릇된 생각들로 음주운전,불법추월,무단횡단 등 우리 교통질서는 어지러워진다.
한데도 이와 비슷한 황당한 꼴을 거리에서 망나니들에게서 당하는 것은 이런 일로 그치지 않는다. 가령 좁은 골목이나 샛길을 간다고 치자.아니면 건물 안의 복도를 가거나 계단을 오른다고 치자.그 전 같으면 좌측통행,요즘 같으면 우측통행의 원칙을 무시하고는 나부대는 축이 한둘이 아니다. 아슬아슬,맞부딪칠 뻔해서는 그나마 용케 서로 비켜 가는 꼴인들 결코 드물지 않다.
큰 거리의 보도에서도 보행자는 당연히 우측통행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한데 거기서 망측한 꼴을 또 당하게 된다. 우리의 보도에서는 거의 다들 제멋대로다. 뿐만 아니다. 예사로 두셋이 어깨를 나란히 걷는 꼴도 보게 된다. 그런 패거리일수록 시시덕대면서 보도를 통째로 차지하다시피 하기 일쑤다. 앞에서 다가오는 사람더러는 아예 보도를 비켜서 차도를 걸으라고 우기고 있는 걸까? 한데 계단에서는 더 볼썽사나운 꼴을 당하게 된다. 가령 아래에서 두서너 층계를 오르고 있을 무렵이라 치자.위에서 두셋 또는 서너 명이 옆으로 한 줄로 서서 내려 오는 것과 맞부딪칠 뻔하는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다.
어쩌란 말일까? 온통 계단을 독과점하고는 위세 당당히 내려오고 있는 그들 앞에서 당장은 마땅하게 비켜설 자리도 없는데,이건 또 무슨 '물렀거라!'일까. 좁은 육교를 올라가거나 내려가려다 보면 또 어떨까. 무슨 일로 모여 있는지 몰라도 젊은이들이 또는 중년의 사람들이 모여 육교 입구를 막아선 채 자기들만의 수다에 열중이다. 오르내리는 다른 사람들은 그 좁은 틈새를 찾아 비켜갈 수밖에 없다.
이런 몇 가지,딱하고도 안쓰러운 거리의 풍경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항다반사(恒茶飯事)다. 차 마시고 끼니 먹듯이 흔해 빠졌다. '고 어헤드(Go ahead)'나 '애프터 유(After you)',어느 것이나 "먼저 가시죠"가 될,이 말들로 실천될 시민윤리가 서구 사회의 것으로 그칠 수는 없다. '남 먼저!' 그것에서 거리의 시민윤리는 비롯될 수 있다. 남이 있어서 비로소 내가 있다는 그 다짐이 거리 시민윤리의 제1조다. 거기 모든 인간관계가 지켜질 헌법이 있다.
거리에서,공공장소에서 남들을 먼저 앞세우는 마음가짐,그게 무너지면 시민윤리는 무너진다. 아니 사회 전체의 기본 질서가 허물어지고 만다. 선진국화를 다급하게 외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 외침이 공허한 헛소리가 안 되기 위해서도 우선 거리의 시민윤리부터 지키자.
---------------------------------------------------------------------------------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압축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선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이에 매주 토요일 '선진한국 길목에서' 칼럼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문제들에 대해 학계 종교계 산업계 등 각 분야 명사들의 제언을 듣고자 합니다. 일상 생활의 사소한 에티켓에서부터 정치 · 사회적 갈등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게 됩니다. /한국경제·우리은행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