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이던 얼굴에 다소 살이 붙었다. 지난해 말 기자들을 만났을 때만 해도 "이제 그만 쉬고 싶다"고 털어놨던 그였다. 이마와 눈가에 깊게 파인 주름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보여주는 듯했다. 한눈에 봐도 몸무게가 3~4년 전에 비해 족히 10㎏은 빠진 모습.

'사즉생(死卽生 · 죽어야 산다)'의 각오로 중요한 순간마다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한 박병엽 팬택계열 부회장(48).한때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다가 지금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중인 회사를 이끌고 있는 그가 새로운 부활을 꿈꾸고 있다.

지난 12일 주총에서 산업은행 등 주요 채권단으로부터 전체 발행 주식의 10% 규모인 1억6400만주에 대한 스톡옵션(주식매수청구권)을 받은 것.

"저희가 주총을 하면 항상 소액주주 분들이 많이 오십니다. 그런데 한 번도 제대로 모실 기회가 없었죠.어제 김포공장에서 주총을 마치고 근처 순두부집에 가서 막걸리 잔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들에게 정말 마음 아프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진솔하게 드렸죠.그분들이 우스갯소리로 그러더군요. 가장 손해본 건 박 부회장이고,열심히 해줘서 고맙다고….그리고 신뢰한다며 최선을 다한다면 결과가 좋든 나쁘든 수긍할 테니 정말 열심히 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

박 부회장을 찾은 것은 지난 토요일 오전.그는 서울 상암동 팬택 본사의 19층 대회의실에서 주요 임직원 60여명과 함께 긴급 회의를 하고 있었다. 최근 국내외 휴대폰 시장이 급변하고 있어 제품군을 다시 점검하기 위해서다.

"기왕이면 같은 칼을 만들어도 아주 크고,날카롭고,뾰족한,특징 있는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선 사령관(영업부장)이 비즈니스를 할 때 '내 칼은 이런 장점이 있기 때문에 상황 봐서 이걸 쓰겠다' 하는 정도의 무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의 전리품(얻을 수 있는 이익)은 얼마야?'라고 따지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

박 부회장의 질책이 이어졌다. 그는 "지금은 새로운 무기를 내세운 업체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무서운 기세로 치고 나오고 있다"며 "그런 회사들로 이익이 쏠리고 있는 상황에서 빠른 시간 안에 우리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워크아웃에 들어간 지 어느 새 3년이 지났네요. 어제 주총에서 스톡옵션까지 받았는데 좀 격려가 됐습니까.

"무덤덤해요. 스톡옵션에 관계없이 저는 제 할 일을 합니다. 정말 책임있게 해야죠.다만 지금은 상황이 좀 어렵네요. 이 업종의 특성인 것 같아요. 그동안 4년 가까이 고생해서 이만큼 만들어 놨는데,지금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기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무시무시한 강자들인 애플 구글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델 등이 뛰어들고 있어 더욱 어려운 상황입니다. "

▼작년 한 간담회에서 한 때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이 납니다. 마음 고생도 꽤 많았죠.

"워크아웃에 들어가고 난 뒤 정말 죽고 싶을 때가 많았죠(웃음).제 자존심도 많이 구겨졌지만 소액주주들에겐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미안했죠.하지만 모든 문제를 떠나서 팬택이란 회사가 우연히 성장한 회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오기가 생겨났어요. 팬택이 수출로 성장한 회사잖아요. 최소한 그런 모습을 다시 보여드리고 정리하는 게 '박병엽'다운 거 아닌가,구성원들에게 할 도리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

▼워크아웃은 내년 11월 말까지죠.원래 일정보다 빨리 졸업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그 판단은 채권단에서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견해로는,졸업 시기는 회사가 아주 튼튼하게 제대로 갈 수 있는 때에 해야 한다고 봅니다. 너무 빨라도 너무 늦어도 안 되겠죠.지금은 휴대폰 산업의 구조 자체가 흔들리는 재편기입니다. 성장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달린 시기라는 얘기죠.그걸 채권단에서 잘 판단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졸업 시기보다는 기업 가치를 얼마나 높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팬택의 기업 가치를 끌어 올리면 스톡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스톡옵션을 행사하려면 지금의 기업 가치보다 2~3배는 끌어올려야 하니까 채권단도 엄청난 투자 수익을 올리는 것이고,저 역시 회사를 찾을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대개 스톡옵션이란 게 채권단이 잘 사용하지 않는 방편인데 상당한 복선이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하게 말하면 다른 방법은 용인하지 않을 테니,회사를 제대로 살려 놓으라는 주문이죠.평생 목숨 걸고 하라는 얘기인데,일부 임원들은 그 고생을 할 바에야 차라리 은퇴하고 쉬라는 얘기도 해요. 그런데 제 장점이 끓는 피 아니겠습니까. 주총이 있던 날 어떤 분이 전화해서 그러더군요. 관전 포인트는 딱 하나다. 앞으로 2년(스톡옵션 행사 가능 시기)이 지나서 또 박병엽이가 미친 짓을 할지,안 할지인데 자기는 한다에 건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그래도 시장상황이 녹록지 않고 변화도 빠릅니다. 애플과 구글이 치고 나오는 것을 보면 걱정이 들지 않나요.

"지금 휴대폰사업은 업력이 먹히지 않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풀빵 장사'를 했어도 어느 정도는 탄력과 관성으로 나아갈 텐데 지금은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요. 어떤 때는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19년 동안 이 짓을 해왔는데,다시 제로에서 시작하는 기분입니다. 앞으로 1년 반에서 2년 정도는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고,한 3년은 더 해야 원점으로 돌아올 것 같네요. "

▼강자들 틈바구니에서 팬택이 살아 남으려면 많은 고민을 해야할 듯한데요. 어떤 전략을 생각하시나요.

"블랙베리를 만드는 캐나다의 림(RIM)과 대만의 HTC 등이 좋은 회사라고 생각해요. 또 애플과 같은 회사에서도 많이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 회의에서도 그런 얘기를 강조했습니다. 우리 내부에 있는 리소스(자원)만을 활용한다는 폐쇄성,경직성을 버리자고요. 외부에도 우리가 원하는,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조력자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고 강조했죠.그런 리소스를 자유롭게 이끌어낼 수 있는 유연성,개방성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동차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다고 해서 다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도요타가 자동차 회사 가운데 1등이지만,고객들에게 주는 가치 측면에서는 BMW가 1등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거든요. 우리가 지향하는 것도 바로 그런 모델이고요. "

▼그런 점에서 팬택의 강점과 약점을 짚어주시지요.

"강점은 글로벌 업체도 공략이 어렵다는 선진시장에서 좋은 실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품질 수준이 매우 높다고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죠.일례로 미국의 AT&T나 버라이즌 같은 통신사에 제품을 공급하는 회사가 7~8개 정도밖에 안 됩니다. 노키아,삼성전자,LG전자,모토로라,소니에릭슨,애플,림 등과 같은 회사를 제외하면 팬택뿐이죠.약점은 아직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지 못하고 있고,다변화한 시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원래 올해부터 기존 미주나 일본 외에도 동아시아,유럽,아프리카 등지로 시장을 확대하려고 했는데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패러다임의 변화 속도,경쟁의 격화 속도,산업의 재편 속도가 예상보다 급격히 앞당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주력하고 있는 부문에 선택적으로 집중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외연을 넓히고 다각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두 일을 했다가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판단인 거죠."

▼최고 경영자로서 포부는 무엇입니까.

"팬택을 정말 제대로 된,튼튼하고 올바른 기업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빨리 정상화시켜 놓고 조금 쉬고 싶네요. 아마도 우리 직원들도 징그러워할 것입니다. 지난 3년간 토요일,일요일에도 일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졸면 죽는 업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