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한국노사관계학회 초청 간담회에서 "민주노총 하면 생각나는 게 쇠파이프,과격행위,붉은 머리띠인데 앞으로는 좀더 온건한 노동운동을 펼쳐 국민에게 다가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민주노총의 브랜드가치를 높이겠다","대의원대회는 1년에 한번만 하겠다","사회적 권위를 높이겠다"는 등의 약속도 곁들였다. 이러한 다짐만 본다면 위기에 처한 민주노총에 무언가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란 기대를 가질 만하다. 하지만 이날 그의 발언을 좀더 들여다보면 민주노총이 변화할 것이란 기대감은 이내 사라진다.

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산하노조들이 민주노총을 탈퇴하는 것에 대해 "탈퇴한 노조 간부들이 너무 정치적이고 조합원을 위한 노동운동을 안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엉뚱한 해석을 내놓았다. "탈퇴노조들이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안 했으면 좋겠다","연맹비를 안 냈을 때 제재를 했어야 했다"는 등 본질과 동떨어진 분석도 내놓았다. 참석자들이 "탈퇴노조들이 민주노총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정파 간 갈등을 꼽았다"고 지적하자 그는 "정파는 (노동단체 내에) 있어야 한다. 정파는 노동운동(활력)의 샘"이라는 황당한 설명도 곁들였다.

조직의 수장으로서 위기에 처한 민주노총의 조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조직논리만 펼치는 데 급급해 한다는 느낌이다. 민주노총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합원과 국민들로부터 왜 비난을 받는지,국민적 지지를 받기 위해선 어떻게 조직을 개혁해 나가야 하는지 등에 대한 진지하고도 제대로 된 분석과 자기반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러 계파가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민주노총은 어떤 성향의 지도부가 집권(?)하든 리더십을 발휘하기 쉽지 않은 조직인 건 사실이다. 더욱이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큰 상황이어서 '투쟁가'를 부르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들다. 이 때문에 민주노총 지도부는 처음 집행부를 맡을 때에는 대화와 타협,실용주의 노선을 다짐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적 조합주의(militant unionism)만을 선호하게 된다.

우리나라 노동운동판에서 간판 '투사'로 활약했던 단병호씨가 민주노총 위원장을 그만둔 뒤 후임 온건파 위원장들이 잇따라 변화와 개혁을 약속했지만 투쟁만능주의,계파 간 갈등 등 구시대 유물은 거의 청산되지 않고 있다. 2004년 이후 민주노총을 이끌었던 이수호 이석행 임성규 등 전임 위원장들 모두가 꿈과 희망이 담긴 운동노선을 다짐해 국민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지만 그러한 다짐을 모두 '공수표'로 날려 보냈다. "투쟁보다 대화를 통한 노동운동을 펼치겠다"(이수호),"붉은 머리띠를 매지 않겠다"(이석행),"노동자들이 이성적으로 변했다"(임성규) 등 위원장들이 바뀔 때마다 부르짖던 '희망가'는 강경파들의 반발을 겪으면서 곧바로 투쟁가로 바뀌었다. 이들 온건파 위원장의 이미지가 강경파로 비쳐지는 것도 이러한 조직구조 때문이다.

위원장이 바뀔 때마다 "붉은 머리띠 풀겠다","쇠파이프 버리겠다"며 말로만 실용주의 운동노선을 다짐한다고 민주노총이 달라지지 않는다. 진짜 문제와 개혁 방향이 무엇인지 면밀한 분석과 그에 따른 처방이 내려져야 국민에게 다가가는 노동단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