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태 한은 총재 후임을 두고 하마평이 무성하다. 등장 인물의 면면을 두고 가부(可否)를 논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청와대나 한국은행 주변에서 떠도는 소위 '적임자의 조건'에는 시비를 걸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청와대 주변에서 들리는 조건이다. 관계자들이 생각 없이 떠드는 말들을 요약하면 총재는 국제 금융을 잘 알아야 하고 가을에 열리는 G20회의에서 다른 나라 중앙은행 총재들을 (이명박 대통령이 그렇게 하듯이) 충분히 관리 내지는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듣기에 그럴싸하다. 이런 조건이라면 후보자는 업적주의로 무장한 마당발에다 고도의 정치력을 갖춘 그런 인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은 총재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가 가볍게 내뱉은 말이기를 바라지만 이런 말들이 모여 엉뚱한 결정에 이를까 걱정된다. 중앙은행이라는 독특한 기관은, 시장에 가장 가까이 머물러야 하지만 동시에 대중으로부터는 가장 먼 곳에 격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자리에 업적주의와 추진력은 어울리지 않는다. G20에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국제적 공조를 만들어 내는 일은 행정 장관들의 전권 소관 사항이지 중앙은행 총재의 본질적 업무가 아니다.

G20에서 중앙은행 총재가 할 일이라고는 각국 재정장관 회의의 열석자이며 결정사항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일이 사실상 전부다. 무엇보다 한은 총재는 실적을 내는 자리가 아니다. 아니 실적이라고 할 만한 업무 목표를 설정해서는 안되는 기관이다. 무자본 특수법인이라는 기관의 본질이 말해주듯이 한은은, 달성할 목표를 설정하여 계획을 세우고 자원을 투입하며 과업을 수행하는 그런 기업도 행정기관도 아니다. 한은은 오로지 수단의 적절성에 주목하며 국가 경제의 다양한 목표들 간에 고도의 균형을 추구하는 무성의 소리요 무형의 그릇 같은 그래서 스스로는 텅비어 있는 것이 조직의 본질이다. 한은 주변에서 나도는 '조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한은 임직원들은 금융감독권 회복 등 해묵은 과제를 해결해주는 파워형 인물이 와주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부채계정의 등가물에 불과한 외환보유고조차 그 일부를 행정부에 빼앗기고 은행에 감사자리 하나 내려보낼 수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를 해결해주는 실세 총재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오조준된 목표다. 세상 일에 공짜 점심은 없는 것이어서 충분한 파워가 실리는 순간 한은은 또 하나의 권력기관일 뿐 더이상 중앙은행이 아니게 된다. 한은 임직원들이 목청을 높이는 소위 독립 문제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한은은 일부 경제학자들까지 동원하여 지난 수십년간 소위 독립투쟁을 해왔다. 정운찬 총리도 그런 사람의 하나였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독립은 정치로부터의 독립이지 정부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다. 예산 통제나 감사를 받아야 마땅하고 행정부와는 건강한 긴장관계에 있으면 충분하다. 실험실의 진공관처럼 또는 시장 아닌 산정(山頂)에 존재하는 그런 기관이 아니다. 아무도 한은에 그런 특권을 준 적도 없다. 한은이 독립하는 조건은 화폐가치와 경제성장이라는 충돌하는 가치의 적중(的中)을 추구하는 데서 형성되는 것이지 조직에 대한 무간섭이나 무견제가 아니다.

이런 조건에서 한은 총재 자리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리품을 파는 대중영합적 인물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초연하며,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눈(雪) 내리는 소리를 듣고자 하듯이 내밀한 경제흐름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이 총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그것이 또한 한은 독립의 원천이다. 미국의 역대 FRB총재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80년대 초 그토록 맹렬한 대중의 비난을 들었던 폴 볼커다. 세계 금융시장에 독약을 풀어놓았던 마당발 그린스펀과는 달리 지극히 비사교적이었던 고독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정규재 논설위원 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