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은 권력의 최고봉이다. 그러니 정상에서 하산한 '전직 권력자'만큼 권력의 속성을 궤뚫어볼 수 있는 자는 드물 것이다.

바츨라프 하벨(74)은 권력의 빛과 그늘에 대한 해답을 내놓기에 적격이다. '프라하의 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정계의 주요 인물로 떠오른 하벨은 6년 가까이 투옥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체코 민주화운동인 '벨벳 혁명'의 주역이기도 한 그는 1989년부터 체코와 슬로바키아 연맹의 마지막 대통령,1993~2003년 체코공화국 대통령을 지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동구권에서 뛰어난 극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퇴임 후 극작가로 돌아간 그가 2008년 초연한 연극 '리빙(Leaving)'이 다음 달 국내 관객을 만난다. 전직 대통령이 최고 권력을 내려놓은 뒤 겪는 고민과 수난을 극작했다는 점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리빙'의 주인공과 하벨이 닮았고,그의 정적이 하벨의 정치적 라이벌(바츨라프 클라우스 현 체코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끌었다. 하벨은 이에 대해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건 1989년으로 대통령이 되기 전"이라면서 부인했으나,실제로 여성편력이 심했던 그의 사생활과 주인공의 모습은 상당 부분 겹친다. 당시 불륜관계였던 아내 다그마르 하블로바를 염두에 두고 '리빙'을 썼다고 고백해 더욱 흥미를 돋운다.

'리빙'은 총리직에서 물러난 60대의 빌렘 리에게르에게 벌어지는 일을 통해 권력의 허망함을 조명한다. 정부 소유 저택에서 오랫동안 동거했던 이레나와 가족들,참모들과 생활하고 있던 리에게르는 어느날 저택에서 떠나라는 통고를 받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신문에는 그의 복잡한 사생활을 폭로하는 기사가 실린다. 게다가 그 와중에 다른 여자와의 밀회 현장이 들통나 이레나마저 떠나버린다. 사면초가에 빠진 그에게 정적은 현 정부를 지지해 달라고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이름의 지위에 있는가 하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리에게르의 발언은 공수표일 뿐이다.

연극의 고전인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 모티프가 곳곳에 포진해 있어 연극 마니아들의 흥미를 자극할 만하다. 하벨은 아내를 주연으로 하고 자신이 감독을 맡아 '리빙'을 영화화하고 있다. 다음 달 2~4일 서울 LG아트센터.3만~7만원.(02)2005-0114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