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닷컴 열기는 정말 대단했다. 당시 정보통신부를 출입했던 필자는 '닷컴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그때는 굳이 정통부 산하단체나 닷컴 기업을 찾아가 취재할 필요가 없었다. 기자실에는 항상 닷컴 기업들의 보도자료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매일 한두 개 기업이 찾아와 "세계 최초"를 강조하며 신제품 설명을 했다. 의심 많은 기자들을 설득하려고 시연하는 경우도 많았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다들 한탕에 눈이 멀었다. 뻥튀기를 해서라도 코스닥에 상장하기만 하면 돈방석에 앉는다는 게 통념이었다. 짝퉁 닷컴과 짝퉁 기자들이 한통속이 돼 투자자들을 속인 패스21 사건도 있었다. 후회스럽다. 그때 왜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던가. 비리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편한 건 아니다.

닷컴 버블이 꺼지기 시작한 지 10년이 됐다. 2000년 3월11일 뉴욕 증시에서 나스닥 기술주 지수가 사상 최고치로 치솟은 뒤 12일부터 급락하기 시작했다. 이 바람에 많은 기업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10년 동안 그야말로 강산이 변했다. 닷컴을 포함한 테크놀로지 산업 생태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초등학생까지 휴대폰을 들고 다니고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이용하는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미국과 우리나라의 변화가 너무 대조적이다. 미국 닷컴 생태계는 놀라운 복원력을 보여줬다. 1998년에 출범한 구글은 거품이 꺼지는 와중에 살아남아 야후를 제치고 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이 됐다. 지난달 4일 여섯 살이 된 페이스북은 4억명이 넘는 가입자를 확보하며 세계 최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업체가 됐고,오는 21일 네 살이 되는 트위터는 지금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테크놀로지 산업계로 넓혀서 봐도 많이 달라졌다. 애플은 아이팟-아이튠즈(2001년)와 아이폰-앱스토어(2007년)를 내놓아 판을 뒤엎었다. 디지털 음악 유통의 최강자가 됐고 휴대폰시장과 이동통신시장의 판도를 확 바꿔놓았다.

우리나라 닷컴 생태계에도 성공사례가 있는가? 맨 먼저 2000년대 중반 싸이월드 열풍이 떠오른다. 그때는 싸이월드가 성공사례를 발표하면 페이스북 직원들조차 경청했다. 그러나 페이스북이 세계적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뜬 반면 싸이월드는 뒷걸음질만 했다. 굳이 꼽으라고 한다면 아이온으로 재미를 보고 있는 엔씨소프트를 들 수 있지만 이 밖에는 내세울 만한 게 없다.

이유는 뭘까? 폐쇄적인 시스템,소프트웨어 산업 낙후,대기업 위주의 정책,기업가정신 상실….꼽자면 한이 없다. 특히 폐쇄적인 시스템은 개방을 표방하는 웹2.0 시대에는 최대 걸림돌이 됐다. 인터넷 서비스든 모바일 인터넷이든 플랫폼을 장악한 선발사업자는 모든 걸 움켜쥐려고만 했다. 이 바람에 콘텐츠 산업,소프트웨어 산업은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려운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다.

닷컴 버블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보도자료에서 '세계 최초'란 말도 사라졌다. 삼성 LG 같은 대기업 보도자료에서나 구경할 수 있을 뿐이다. 뻥튀기 풍토가 사라진 점은 반길 일이다. 하지만 뻥이라도 좋으니 신생 기업으로부터 "세계 최초"란 말을 듣고 싶다. 창업 열기도 미지근하고 세계를 장악하겠다는 의욕도 약해 보인다. 닷컴 버블 붕괴 10년을 계기로 전반적으로 재점검했으면 한다.

김광현 IT전문기자 k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