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 자본주의' 목소리 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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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의 '주총안건 반대' 2009년 절반으로 급감
'장하성 펀드' 잇따라 완패…지분 팔면 주가 오르기도
'장하성 펀드' 잇따라 완패…지분 팔면 주가 오르기도
지난해 3월27일 충남 아산사업장에서 열린 코스닥 상장사 에스에프에이의 정기 주주총회는 시작 전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경영 참여를 선언한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일명 장하성펀드) 측이 위임장의 진위 여부를 철저히 가려야 한다고 주장해 개회가 1시간이나 지연됐고,경영진과 장하성펀드 측이 이사와 감사위원 후보를 별도로 추천해 결국 표 대결까지 갔다. 대주주 측은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장하성펀드의 거센 공격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만인 오는 26일 주총을 여는 에스에프에이는 이제 느긋한 표정이다. 이달 초 장하성펀드가 지분을 정리하고 떠났기 때문이다. 이 회사 김영민 전무(CFO)는 "장하성펀드가 지분을 정리한 데다 이번 주총 안건들은 주주 권익을 보호하고 경영투명성을 높이는 내용이어서 원안대로 무난히 통과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2003년 '소버린'에 이어 '칼 아이칸''장하성펀드' 등이 잇달아 등장하며 확산되던 '펀드 자본주의'의 기세가 올 들어 한풀 꺾이는 양상이다. 자산운용사를 포함한 기관투자가들이 '반대' 의사를 밝힌 올 주총 안건은 지난해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다. 주총에서 고성이 오가고 '표 대결'까지 가는 경우도 크게 줄어든 모습이다.
◆기관,주총 안건 '반대' 급감
17일 한국거래소가 상장사 주식을 보유한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공시 현황을 조사한 결과 올 들어 지난 15일까지 주총 안건에 '반대' 의사를 표시한 건수는 30건에 머물렀다. 전년동기 56건의 절반 수준이다. 자산운용사들이 주주총회 5일 전까지 주총 안건별로 찬성 반대 불행사 중립 등의 의결권 행사 내용을 사전 공시한 결과다.
이는 펀드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영향력도 점차 확대돼온 지금까지의 추세와는 반대되는 흐름이다. 특히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주총 안건에 대한 반대는 지난해 49건에서 올해 15건으로 급감했다. 반대 의견은 이사 선임이 7건으로 가장 많았고 감사 선임 3건,정관 변경과 배당지급건이 각각 2건이다. 동양투신은 19일 주총을 개최하는 한라건설이 이사 보수 한도를 올리려는 데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혀 놓고 있다.
코스닥시장 상장사는 지난해 7건에서 15건으로 '반대' 건수는 늘어났다. 하지만 한국밸류자산운용과 푸르덴셜자산운용이 한텍과 모린스의 대부분 안건에 대해 무더기 반대 의사를 표한 것을 제외하면 작년과 비슷한 수준이다.
코스닥 상장사도 감사 선임과 정관 변경에 대한 반대가 4건씩으로 가장 많고 이사 선임(3건),감사 보수(2건) 등이 뒤를 잇는다. 이원일 알리안츠자산운용 사장은 "네패스는 정관 변경안에 '초다수결의제' 채택을 올려 놓고 있다"며 "주주 가치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주총에서 반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기관 목소리 낮아진 이유
올 주총에서 기관투자가들의 '반대' 의견이 줄어든 것은 적대적 M&A와 같은 쟁점이 될 만한 주총 안건이 별로 없다는 게 주된 이유로 꼽힌다. 상장사들의 이익이나 배당이 늘어난 데다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경영 투명성에 대한 의지도 높아져 의견 충돌 가능성이 낮아진 것이다.
지난해 삼성전자 LG전자 SK텔레콤 등 주요 기업들의 이사 보수 상향에 '반대' 표를 던졌던 박종규 현대인베스트먼트 사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기업 실적이 개선되고 배당도 20%가량 늘어나는 등 기업들의 경영성과가 좋았다"며 "올 이사 보수 상한에 대해선 이견이 없는 편"이라고 말했다.
기업들도 지배구조 개선이나 투명성 제고를 위해 힘쓰고 있으며 주주들 눈치를 보느라 무리한 안건은 섣불리 올리지 않는 추세라는 지적도 있다. 이 사장은 "기업 경영진과 매달 또는 분기에 한번 정도는 만나 주주 입장에서 의견을 나눈다"며 "주총 안건으로 오르기 전에 사전 조율을 거쳐 반대할 만한 사안은 올리지 않기도 한다"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경영 참여를 주장하며 기업들과 맞서 온 장하성펀드는 올 주총에서도 잇달아 완패하고 있다. 지난 12일 열린 태광산업과 대한화섬 주총에서 장하성펀드가 제안한 감사 선임과 배당금 증액은 모두 무산됐다. 게다가 지분을 정리한 종목은 오히려 팔고 난 후 강세를 보이고 있다. 장하성펀드가 4년 만에 손실을 보고 정리한 에스에프에이는 이달 들어서만 15% 이상 올랐다.
장인환 KTB자산운용 사장은 "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는 기업 가치를 높여 펀드 이익을 늘리려는 펀드"라며 "하지만 주가가 오르면 기관의 차익 매물이 대거 쏟아질 수 있다는 우려감에 기관 지분이 높은 종목의 주가 흐름은 오히려 부진한 편"이라고 지적했다. 또 단기 수익만을 노리고 경영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어 주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서정환/조재희/강현우 기자 ceoseo@hankyung.com
◆펀드 자본주의=펀드 또는 기관투자가가 기업 경영과 금융시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경향을 말한다. 펀드는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기업의 지배권에 힘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권력으로 간주된다. 기업의 주요 경영사항을 결정하는 주주총회에서 기관의 의결권 행사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