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서울 압구정동 로데오거리 골목을 거닐다 보면 풍월당이란 이름의 가게를 만날 수 있다. 정신과 의사이자 클래식 평론가인 박종호씨가 운영하는 풍월당은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의 메카와 같은 곳이다. 여기에 '풍월당 아카데미'란 이름의 강좌를 통해 클래식,오페라 등에 관한 활발한 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다. 단순한 음반 가게라기보다는 클래식에 관한 문화를 총체적으로 접할 수 있는 문화 공간에 가깝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는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는 진지한 관객이 부족한 편"이라며 "이런 관객을 늘리는 것이 풍월당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사례2.지난달 25일 강남구 신사동 광림교회 옆 장천아트홀에선 독일 최고 뮤지션들이 모인 베를린 캄머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 열렸다. 이날 공연에선 이스라엘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미카엘 주커닉(Michael Zukernik)의 열정적인 지휘가 함께 했다. 가격도 무척 저렴했다. 일반석 기준으로 1만원.삼성동에 사는 주부 김희수씨(42)는 "집에서 CD로만 듣던 비발디의 사계를 직접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으며 또 다른 감동을 느꼈다"며 "매주 홈페이지에서 공연 일정을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합 문화 클러스터

강남은 화려한 소비도시이긴 하지만 음악 미술 전시 공연이 집중되는 '문화 클러스터'이기도 하다. 잘 차려입고 격식을 차려야 즐길 수 있는 문화도 있지만 언제 어디서든 편한 차림으로 찾아갈 수 있는 생활친화형 문화도 있다.

소득 수준이 높고 전문가 집단의 거주 비율이 높아 각종 문화행사도 활발하다.

'찾아가는 음악회'는 강남구청의 주도로 설립된 강남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음악회다. 서울에는 구청 주도로 만든 문화재단이 이곳을 포함해 중구 마포구 구로구 등 총 4곳이 있다. 이 중 독자적인 오케스트라를 갖춘 재단은 강남문화재단이 유일하다.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는 1년에 100회 이상의 공연을 하고 있다. 백화점 문화센터부터 아파트 주민 모임까지 클래식 음악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연주를 들려준다. 이 오케스트라의 단원은 73명으로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오케스트라다. 김홍식 부지휘자는 "연령층이 다양하고 공연에 대한 집중도도 높다"고 말했다.

강남엔 복합 공연홀도 많다. 주부 어린이 직장인 등 다양한 계층들의 문화적 욕구를 흡수하기 위한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최초로 강남에 둥지를 튼 유시어터와 작년에 개관한 윤당아트홀을 포함해 현재 강남구에는 16개의 소공연장이 등록돼 있다. 압구정역 근처의 소극장 윤당아트홀의 경우 갤러리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곁들일 수 있는 카페를 갖추고 있다. 공연을 마친 뒤 같은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배우나 연출자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이 소극장의 고학찬 과장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그림을 감상하던 손님들이 공연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연극 관객으로 변한다"며 "강남 지역엔 이처럼 문화의 원스톱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저변 넓어진 갤러리

청담사거리에서 압구정역 방향으로 조금 걷다 보면 우측에 네이처포엠(nature poem)건물이 들어서 있다. 전면을 유리로 장식한 이 빌딩은 얼핏 보기엔 주변에 늘어선 명품 매장들 중 하나로 보일 정도로 모던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1층 오페라갤러리 쇼윈도에는 5억원을 호가하는 페르난도 보테로의 조각상 '돈나 아 카발로'가 고객의 선택을 기다리는 명품처럼 진열돼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빌딩은 무려 18개의 화랑이 밀집해 있는 갤러리 전문빌딩이다. 전 세계 11개 지점을 보유한 국제 갤러리산업체 오페라갤러리가 2007년 10월 들어선 데 이어 박여숙화랑,마이클슐츠갤러리 등이 줄줄이 입점했다. 인사동이나 삼청동의 화랑들이 적어도 간판은 걸어놓고 영업을 하는 것에 비해 이 지역 화랑들은 빌딩 안에 들어가 안내판을 보기 전까진 화랑인지 아닌지 구별이 잘 안 될 정도다. 손성옥 갤러리 엠 대표는 "청담동 화랑은 유동 인구가 적은 데다 알고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무리하게 외관을 꾸미지 않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미술 정보 잡지 서울아트가이드에 따르면 청담동에 자리잡은 화랑의 수는 총 66개나 된다

과거 우리나라 미술시장의 중심은 단연 인사동과 북촌이었다. 현대갤러리 국제갤러리 아트선재를 비롯한 대형화랑의 상당수가 이 지역에 밀집해 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청담사거리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갤러리들이 생겨나면서 미술시장 판도가 급변해왔다. 갤러리의 이동은 단순히 시장의 위치 변화에 그치지 않았다. 고급 문화의 수요 증가와 맞물려 다양한 스펙의 작품들이 공급되기 시작했다. 투자나 과시적 구매보다는 미술 자체를 좋아해 갤러리를 찾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권기찬 오페라갤러리 대표는 "강남 사람들이 과거에는 문화를 물질적인 측면으로 접근했지만 이제는 배우고 즐기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이승우/이유정/정소라 기자 youdae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