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에어컨 및 공조기는 생활편익장비.그렇지만 소음과 진동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골칫덩이로 돌변할 수도 있다. 방진 · 방음재가 이런 고민을 해결해 준다. 유일엔시스(대표 김웅수)는 국내 최초로 건물용 소음 · 방진재를 개발한 이 분야 간판 기업이다.

소음 · 방진재는 건물 건축 시 공조기,난방기,물탱크,엘리베이터 등에서 발생한 소음과 진동을 흡수하도록 만들어진 자재다. 고무와 스프링 등으로 구성돼 있다. 러버패드,쇼크마운트 등이 대표적인 상품.1980년 창업한 유일엔시스는 연간 20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업계 선두권을 달리고 있다. 시장점유율은 30% 수준.이회사 제품은 세종로 정부종합청사,63빌딩,롯데호텔,힐튼호텔은 물론 파주의 LG 디스플레이의 LCD공장에도 쓰였다. 회사 관계자는 "경기도 이천 하이닉스반도체 공장에 쓰인 미세진동을 없애는 방진재의 90% 이상을 납품했다"며 "지하철 분당선 전 역사에도 공급했다"고 말했다.

창업주 김유일 회장(63)과 소음 · 방진재와의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대학 졸업 후 롯데에서 기계 및 과자 생산라인의 설계를 담당하던 김 회장은 1978년 현장 설계 및 시공감독으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건설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는 현장에서 사용되는 방진재가 전량 일본산이라는 점에 착안,직접 개발하겠다는 뜻을 세운다. 김 회장은 "물건을 뜯어보니 생각보다 단순한 구조인데도 일본산이 터무니 없이 비싸게 거래됐다"며 "반년간 머리를 싸매고 연구한 끝에 일제와 비슷한 품질을 가진 제품을 절반 가격에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술회했다. 1980년 4월 인천 남동공단에서 유일산업을 출범시킨다. 서울 등 대도시에 고층건물들이 들어서면 방진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고 판단한 결과다.

그러나 사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수요처에서 방진재를 '필수품'으로 인식하지 않은 탓이다. 김 회장은 "5년여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그런 것을 뭐하러 쓰느냐'였다"고 말했다. 그는 겨우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 정도로 사업을 간신히 꾸려나갔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예측처럼 아파트 건설붐이 일어나면서 회사는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김 회장은 "밤샘해서 물건을 만들어도 늘 물량이 달렸다"고 회고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회사는 1990년대 중반 후발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위기에 몰렸다. 영세업체들이 덤핑공세를 벌인 탓이다. 게다가 납품 직전까지 갔던 지하철 역사 수주건을 모 대기업에 뺏기면서 수십억원의 손해를 봤고 주 고객이었던 대우건설이 외환위기를 맞아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매출이 예년의 40% 수준으로 떨어지는 등 사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김 회장은 "눈물을 머금고 직원 80명 중 약 40명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며 "그 와중에도 경쟁사가 연구직원을 빼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고민 끝에 김 회장이 던진 승부수는 사업다각화였다. 2000년 초 미국의 컨티넨탈이나 굿이어 등 외국 타이어업체들이 국내 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분야인 차량용 충격흡수장치 에어스프링에 눈을 돌린 것.에어스프링은 이른바 '쇼바'로 불리며 자동차 바퀴옆에 장착되는 쇼크업소버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제품.스프링 대신 고무통 안에 압축된 공기를 넣어 충격을 흡수한다. 그는 국내 모 타이어 전문 대기업이 개발을 포기했다는 말을 듣고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만 방진재를 20년 넘게 만들어 오면서 생긴 '하면 된다'는 자신감도 한 몫 했다.

개발기간만 5년이 걸린 쉽지 않은 프로젝트였다. 승차감을 좋게 하면서도 고무통이 터지지 않게 하는 기술은 중소기업이 도전하기엔 사실상 벅찼다. 김 회장은 "사재 30억원을 털어넣는 등 총 50억원을 쏟아부었다"며 "회사를 살려야겠다는 마음도 컸지만 시간이 흐르자 오기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2005년 말 개발에 성공한 이 제품은 외국산에 비해 품질이 대등하고 가격이 절반 수준에 불과해 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2007년부터 타타대우상용차의 트럭과 버스에 납품하게 되면서 회사는 굳건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2009년엔 30억원어치가 팔렸고 올해 이 분야에서만 약 100억원의 매출이 예상된다. 유일엔시스는 현재 미국의 트럭전문회사인 내비스타와 함께 에어스프링을 개발 중이다. 김 회장은 "현재 샘플 테스트 중으로 내비스타에 공급이 시작되면 최대 연 300억원어치가 팔릴 것으로 기대한다"며 "미국에서 품질을 인정받으면 국내 시장의 입지도 함께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9년 5월 슬하 1남1녀 중 장남으로 2002년 입사해 2007년부터 회사의 신성장동력인 태양광 사업분야를 개척하는 등 경영능력을 보여준 김웅수 대표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현재 회사 연구소에서 신제품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김 회장은 "국내 최초의 방진재 자동화 생산라인을 개발 중"이라며 "은퇴하는 그날까지 제품 개발에 매진하고 싶다"고 밝혔다.

화성(경기)=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