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투자의 대가인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이 "앞으로 15~20년 뒤엔 유럽의 단일통화인 유로화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의 재정 위기로 단일 통화인 유로화 입지가 위축되고 국제금융시장에서 급속도로 약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유로화의 해체를 예견한 것이다.

로저스 회장은 17일 경제전문 방송인 미 CNBC와 인터뷰에서 "과거에도 통화동맹이 있었으나 살아남은 적이 없다"며 "앞으로 15~20년 뒤 유로화가 해체될 것"이라고 어두운 전망을 했다.

그는 또 "유로존 회원국들이 그리스를 돕게 되면 유로화의 근본을 약화시키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그리스 지원 움직임에 반대 입장도 표명했다. 설사 유로존 회원국들이 구제금융을 통해 급한 불을 꺼도 그리스 차기 정부가 구제금융 조건완화 등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리스가 파산하도록 둬 모든 사람들이 유로화가 믿음직한 통화라는 점을 알도록 해야 한다고도 했다. 유로화의 안정을 위해서는 그리스와 같은 '불량국가'를 퇴출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투자의 귀재라는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 회장도 지난달 "그리스 재정 위기로 유로화에 대한 많은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며 "유로화가 살아남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마틴 펠드스타인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가 "그리스의 긴축정책이 실패하고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가 유로 단일통화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그리스로서는 유로존에서 탈퇴하면 통화 가치를 적정 수준으로 평가절하하고 수출 증대로 결국 재정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런 와중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17일 자국 하원 연설에서 "재정적자 기준을 상습적으로 위반하는 국가를 유로존에서 퇴출시키는 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거듭 그리스 등 재정이 취약한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을 공격하고 나섰다. 유로존 최대 '전주(錢主)'격인 독일이 유로존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강제퇴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어서 주목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들은 메르켈 총리의 이 발언이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의 '독일 책임론'을 무마하고 그리스를 압박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리스 지원에 적극적인 프랑스 등 다른 나라와 달리 독일은 자금 지원에 난색을 표시해 구제금융 합의의 최대 걸림돌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집권 기민당(CDU) 재무담당 대변인 미하엘 마이스터는 메르켈 총리의 연설 직전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그리스 지원은 국제통화기금(IMF)이 반드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며 IMF 구제금융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 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이날 프랑스 시사주간지 르 푸앵과의 인터뷰에서 "유로존 회원국 축출이란 아이디어는 말도 안된다"고 밝혀 EU 내부에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독일의 압박에 대해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는 이날 "오는 25~26일 열리는 유럽연합(EU) 정상회담까지 유로존의 구체적인 지원안이 나오지 않으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 집행위원장을 만난 뒤 기자들에게 "IMF는 지금까지 발표된 재정적자 감축 계획 이상은 요구하고 있지 않다"며 IMF행에 으레 뒤따르는 긴축정책의 부담도 없다고 언급했다. 그리스는 5월 중순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국가채무 80억~100억달러를 갚기 위해 새로 국채를 발행해야 하지만 유로존의 지급보증 등 특별한 지원이 없을 경우 매우 높은 수준의 이자율을 감내해야 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그리스의 IMF행은 유로존 이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그리스로선 '벼랑 끝 전술'인데 유로화 장래와 관련해서도 결과가 주목된다.

한편 EU 집행위원회는 이날 EU 회원국 중 14개국이 내놓은 재정 건전성 확보 계획을 검토한 결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대부분 국가가 2014년까지 EU 기준인 GDP 대비 3% 수준으로 재정적자를 줄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올리 렌 경제 · 통화담당 집행위원은 "경제성장률 등 거시경제지표 가정들이 너무 낙관적이라 죄다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밝혔다. 그는 "EU 재정적자 기준을 맞출 수 있는 국가는 불가리아와 에스토니아뿐"이라고 덧붙였다.

뉴욕=이익원 특파원/조귀동 기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