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신학기 '병아리떼'의 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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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맑은 웃음속 동심 사랑스럽지만
예의·질서 없는 모습에 불쾌감도
예의·질서 없는 모습에 불쾌감도
오랫동안 초등학교와 마주 보는 집에서 살아왔다. 시끄럽지 않냐고 묻는 이들도 있지만 그곳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소리가 소음처럼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라도 들려올라치면 목청껏 그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아릿해진다.
'초록빛 여울물에 두 손을 담그면'이라든가 '펄펄 눈이 옵니다' 같은 노래 소리가 들려오면 따라 부르기도 한다. 잠시나마 고운 꿈을 꾸며 해맑은 웃음을 웃던 시절로 훌쩍 돌아가 보는 것이다. 쉬는 시간이면 자갈돌을 비비듯 재깔재깔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시끄럽긴커녕 슬쩍 끼어들어 근심 없는 수다를 떨고 싶어지기도 한다. 방학이 되어 종일 고요한 날들이 이어지면 은근히 심심해지기조차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담 너머의 아이들은 조용할 때나 소란스러울 때나 늘 사랑스러운 존재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작업실을 오가는 아침 저녁으로 아이들을 마주치게 되는데,눈앞에서 보는 아이들은 어쩐지 담 너머의 그 아이들이 아닌 것 같다. 아이들은 교문앞에서 받은 학습지 광고전단을 길바닥에 마구 버리고,과자 봉지도 주저없이 던져버린다. 우측통행 따위 상관없다는 듯 뒤엉켜 육교를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면 그 아이들이 질서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까 싶다. 그 틈을 힘겹게 헤쳐나가면서 나도 모르게 투덜거리게 된다. 도대체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으며 가정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나. 아이들만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어린 자녀들을 데리러 나온 엄마들은 삼삼오오 좁은 육교의 입구를 막아선 채로 중구난방 떠들어대고 있으니.
내겐 잊히지 않는 아픈 추억이 하나 있다. 오래 전,뮌헨 근교에 있는 유대인 수용소 다카우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배낭여행 중인 우리 일행은 셋이었다. 아우슈비츠도 아닌 이 작은 수용소에 세계 최고 혹은 최대를 유난히 좋아하는 한국 사람은 우리 외엔 보이지 않았다. 여름날이었고 흐린 하늘에선 간간이 비가 뿌렸다. 시설을 다 둘러보고 기념관으로 들어선 우리는 인간의 사악함과 잔혹성에 대한 얘기를 잠시 나누었고 다음 행선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저 구석에 서있는 누군가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 전형적인 아리안계 외모의 젊은 남자였다. '나의 미모란 대륙을 넘어 우생학적인 자만심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아리안족 틈에서도 꿀리지 않는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막 드는 순간 그 잘 생긴 남자가 내게로 다가왔다.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그는 내 까만 머리색깔을 배려했는지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그것도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여기는 기념관의 입구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조금만 비켜서서 얘기해주지 않겠습니까?"
그의 어투에는 힐난이나 경멸의 기색은 없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여행 중 마주쳤던 '추한 한국인'에 대해 예리하게 비판하던 내가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귀국한 내 눈에 비로소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통로의 한가운데서,건물의 출입구에서,좁은 계단 가운데 무리를 지어서 대책 없이 수다를 떨고 있는 사람들이.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길을 막고 서있는 사람들 사이를 간신히 지나게 될 때면 여전히 낯뜨거웠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3월이 되자,육교 아래 내놓은 병아리떼처럼 귀여운 신입생들을 마주치게 된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울 것들이 참 많겠지만,동시에 사소하지만 당연한 예절도 가르쳐야만 할 것이다. 교문 바깥으로 나오면 심오한 학문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교양이 한 인간을 아름답게,그리고 사랑스러워 보이게 한다.
정미경 < 소설가 >
'초록빛 여울물에 두 손을 담그면'이라든가 '펄펄 눈이 옵니다' 같은 노래 소리가 들려오면 따라 부르기도 한다. 잠시나마 고운 꿈을 꾸며 해맑은 웃음을 웃던 시절로 훌쩍 돌아가 보는 것이다. 쉬는 시간이면 자갈돌을 비비듯 재깔재깔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시끄럽긴커녕 슬쩍 끼어들어 근심 없는 수다를 떨고 싶어지기도 한다. 방학이 되어 종일 고요한 날들이 이어지면 은근히 심심해지기조차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담 너머의 아이들은 조용할 때나 소란스러울 때나 늘 사랑스러운 존재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작업실을 오가는 아침 저녁으로 아이들을 마주치게 되는데,눈앞에서 보는 아이들은 어쩐지 담 너머의 그 아이들이 아닌 것 같다. 아이들은 교문앞에서 받은 학습지 광고전단을 길바닥에 마구 버리고,과자 봉지도 주저없이 던져버린다. 우측통행 따위 상관없다는 듯 뒤엉켜 육교를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면 그 아이들이 질서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까 싶다. 그 틈을 힘겹게 헤쳐나가면서 나도 모르게 투덜거리게 된다. 도대체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으며 가정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나. 아이들만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어린 자녀들을 데리러 나온 엄마들은 삼삼오오 좁은 육교의 입구를 막아선 채로 중구난방 떠들어대고 있으니.
내겐 잊히지 않는 아픈 추억이 하나 있다. 오래 전,뮌헨 근교에 있는 유대인 수용소 다카우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배낭여행 중인 우리 일행은 셋이었다. 아우슈비츠도 아닌 이 작은 수용소에 세계 최고 혹은 최대를 유난히 좋아하는 한국 사람은 우리 외엔 보이지 않았다. 여름날이었고 흐린 하늘에선 간간이 비가 뿌렸다. 시설을 다 둘러보고 기념관으로 들어선 우리는 인간의 사악함과 잔혹성에 대한 얘기를 잠시 나누었고 다음 행선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저 구석에 서있는 누군가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 전형적인 아리안계 외모의 젊은 남자였다. '나의 미모란 대륙을 넘어 우생학적인 자만심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아리안족 틈에서도 꿀리지 않는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막 드는 순간 그 잘 생긴 남자가 내게로 다가왔다.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그는 내 까만 머리색깔을 배려했는지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그것도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여기는 기념관의 입구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조금만 비켜서서 얘기해주지 않겠습니까?"
그의 어투에는 힐난이나 경멸의 기색은 없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여행 중 마주쳤던 '추한 한국인'에 대해 예리하게 비판하던 내가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귀국한 내 눈에 비로소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통로의 한가운데서,건물의 출입구에서,좁은 계단 가운데 무리를 지어서 대책 없이 수다를 떨고 있는 사람들이.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길을 막고 서있는 사람들 사이를 간신히 지나게 될 때면 여전히 낯뜨거웠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3월이 되자,육교 아래 내놓은 병아리떼처럼 귀여운 신입생들을 마주치게 된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울 것들이 참 많겠지만,동시에 사소하지만 당연한 예절도 가르쳐야만 할 것이다. 교문 바깥으로 나오면 심오한 학문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교양이 한 인간을 아름답게,그리고 사랑스러워 보이게 한다.
정미경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