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전 미국에 처음 유학갔을 때의 얘기다. 캠퍼스가 넓다 보니 첫날부터 강의실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허둥대다가 결국 캠퍼스 버스를 타고 움직여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내게는 모두 생소한 것뿐이었다. 겨우 버스에 올라탔지만,이번엔 또 요금 때문에 당황했다. 학교 버스라서 당연히 공짜인 줄 알았는데 동전을 넣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동전을 준비하지 못해 허겁지겁 찾고 있는데,앞자리에 앉은 두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 내 차비를 넣어주려 하지 않는가.

소득 늘었지만 사회적 신뢰 낮아

엉겁결에 그 도움으로 버스에 탈 수 있었지만 지금도 그때의 당혹감이 머릿속에 생생하다. 얼마짜리 동전인지조차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던 때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새내기 유학생에게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주는 감동이었다. 그 일은 경제학을 전공하는 내게 또 하나의 과제를 던져 주었다. 과연 얼마나 풍요로워지면 남을 그처럼 배려할 수 있는 것일까? 소득이 올라가면 자연스레 그렇게 되는 것일까?

세계적인 거부 워런 버핏은 돈을 빌려달라는 딸에게 "돈은 은행에서 빌리는 것이지,부모한테 빌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축구팀에서 아버지가 유명한 센터 포드였다고 그 자리를 아들이 물려받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힐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가족에게 그렇게 인색한(?) 미국 문화에서,어떻게 전혀 알지 못하는 외국인에게 그런 배려를 베풀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사람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스토리가 전개될 수도 있으리라.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회가 선진화될수록 배려의 범위가 나와 내 가족에서 점차 이웃과 남으로 확대된다는 사실이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신뢰가 뒷받침돼야만 선진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내가 먼저 이웃을 배려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이웃도 나를 믿고,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형성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불행히도 지금 우리 사회는 비록 소득은 크게 늘었다 할지라도 사회적 신뢰는 아직도 후진국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신뢰는 고사하고 개인 간의 믿음도 너무나 부족하다. G20 의장국이라고 우쭐대면서도 '서로 믿지 못한다'는 비율은 오히려 중국보다 훨씬 높다. 심지어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달려와도 36%의 시민들은 응급 환자가 실려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다른사람 배려하는 마음 가져야

이웃에 대한 배려는커녕 서로를 믿지 못하니 법질서와 정치,언론,교육 등 사회제도를 어떻게 신뢰하겠는가. 정치인과 국회는 물론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회적 신뢰가 너무나 취약하다. 이런 환경에서는 자기와 특수관계에 있는 혈연과 지연,학연 등 폐쇄적인 네트워크에만 의존하고,능력이나 형평의 가치는 설 땅을 잃게 된다. 나아가 계층 간 갈등도 첨예화되고,대화와 소통을 가로막는 불신의 장벽만 높아진다. 그래서 이런 갈등으로 인한 비용이 자그마치 GDP의 27%에 달한다고 하지 않는가.

어디서부터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선진국으로 비상할 수 있을까. 역시 그 첫 출발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믿음이다. 법질서와 사회제도의 개혁도 중요하지만,내가 남을 아껴줄 때 그도 나를 배려해 주는 법이다. 내가 먼저 신뢰받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소외당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세상을 향한 그의 마음도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선진국은 결코 국민소득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 못지않게 이웃을 존중하고,서로를 신뢰하는 문화가 더 중요하다. 이런 공동체 문화를 도외시하고 물질적 풍요만 추구하는 사회는 결국 약한 썰물에도 쓰러져 버리는 사상누각과 다를 바 없다.

정갑영 < 연세대 교수·경제학 >